[인재의 고장 청송 .9] 흐르는 강물처럼 살다간 하음 신즙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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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7-25   |  발행일 2018-07-25 제13면   |  수정 2018-07-25
“적이 눈앞에 있는데 병기를 묻을 순 없다” 불의 참지 못했던 13세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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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안덕면 신성리 방호정에는 수많은 시인묵객의 글이 걸려 있는데 창석 이준의 시를 차운한 신즙의 글이 작은 편액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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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동오선생유적비(五仙洞五先生遺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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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즙의 과거기록이 담겨있는 국조문과방목.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강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이 당세의 표준이라 했으며 성리학을 비롯해 의약, 복서(卜筮), 지리, 천문 등에 통달했다고 전한다. 불의에는 뒤돌아섰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앞에 섰다. 그리고 어느 날 어머니를 강가에 묻고는 스스로 ‘하음(河陰)’이라 했다. 세상을 흐르며 여러 곳에 이름을 남겼으나 그의 이름 가진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흐르는 그림자만 남겼다. 그는 신즙(申緝 혹은 신집(申楫))이다.

명지재 민추에 수학…문과 병과 급제
영창대군 옥사하자 벼슬 버리고 낙향
조형도·권익 등과 학문 논하길 즐겨
정묘호란 때 백성 안집시키는데 큰 공
생전‘정비변사진폐문’등 많은 글 남겨


#1. 불의를 다그친 어린 신즙, 그리고 조부 신연

평산신씨(平山申氏) 우헌(寓軒) 신연(申演)은 진보(眞寶) 합강(合江)에 살다가 안덕(安德) 창리(倉里)로 이거했다. 그는 선성이씨(宣城李氏) 이훈(李薰)의 딸과 혼인해 아들 신경남(申慶男)을 낳았다. 주부(主簿)를 지낸 신경남은 안동권씨(安東權氏) 참봉(參奉) 권제세(權濟世)의 딸과 혼인해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이 신즙이다. 신즙은 선조 13년인 1580년 5월15일, 외가인 안동(安東) 송촌리(松村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자는 여섭(汝涉), 호는 하음(河陰)으로 그는 청송 파천면(巴川面) 중평리(中坪里)에서 살다가 안덕의 만안(萬安)에 복거(卜居)했다.

신즙은 일찍이 명지재(明智齋) 민추(閔樞)에게 수학했다. 상주 율리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를 찾아가 옥성서당에서 머물며 학문을 배웠으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기도 했다. 동래정씨(東萊鄭氏) 매오(梅塢) 정영후(鄭榮後)와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과는 인척 관계로 모두가 우복의 제자였다.

신즙이 13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때 그는 동래정씨 집성촌인 예천 용궁(龍宮, 현 지보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을 수령 이용순(李用純)이 유지들을 모아놓고 ‘적과 싸워서는 승산이 없으니 무기를 묻어버리고 피신하는 것이 상책’이라 하자, 조부를 따라 그 자리에 있던 신즙이 앞으로 나가 “병기는 적을 막는데 쓰는 무기이거늘 하물며 적이 눈앞에 있는데 병기를 묻어 버리는 행동은 고을의 책임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라고 말하니 모든 어른들이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조부 신연은 전쟁 발발 2년 후인 1594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청송 안덕에 묻혔으며 묘갈명은 몇 년 후 손자 신즙이 부탁해 우복 정경세가 썼다. 우복은 자신이 청송에서 들은 신연의 이야기를 묘갈에 담았다. 임진왜란 동안 청송은 왜적의 침입을 받지 않아 피란 온 사람들로 가득 찼는데 눈물을 흘리며 살려 달라 하여도 문을 닫아걸고 거절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그 가운데 신연은 문 밖에 솥을 걸고 집안의 식량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먹이고 보살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목숨을 구한 사람은 많았지만 전 재산이 바닥나게 되었으며 그가 죽자 묘지인 안덕 두음산(杜音山)은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1604년 4월 신즙은 주왕산(周王山)에 올랐다. 그는 주왕산 곳곳의 명승을 며칠 동안 돌아보며 각 장소의 풍광, 역사, 전설 등을 세세하게 적은 ‘유주방산록(遊周房山錄)’을 남겼다. 산에서 그는 혈연관계가 있는 어른 임흘(任屹)을 우연히 만나 이틀을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손을 잡고 헤어졌는데, 헤어진 후에 갑자기 슬퍼졌다’는 심회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후 신즙은 여강서원(廬江書院, 현 호계서원) 등에서 독서에 매진했다. 선조 39년인 1606년에는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 21위로 급제했다. 이후 성균관 전적(典籍)을 지내다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정자(正字), 저작(著作), 박사(博士), 전적(典籍)에 차례로 올랐다. 하지만 1613년 영창대군이 옥사하자 신즙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2. 청송에서 학문을 논하고 강론하다

신즙은 청송에서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 방호(方壺) 조준도(趙遵道), 창석(蒼石) 이준(李埈), 풍애(風崖) 권익(權翊) 등과 자주 어울렸다. 이들은 조씨 형제의 아버지가 살았던 망운정(望雲亭)에 모여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거나 신성계곡의 방대(方臺)에서 노닐기도 했다. 그들은 방대 일대를 오선동(五仙洞)이라 부르며 각자 신선의 이름을 지었는데 신즙은 ‘청학도인(靑鶴道人)’이라 하였다. 1619년 조준도가 방대 위에 ‘방호정(方壺亭)’을 지었을 때는 정자에 모여 강론하기도 했다. 지금 방호정 옆에는 그들 다섯을 기억하는 ‘오선동오선생유적비(五仙洞五先生遺蹟碑)’가 서 있다.

방호정 정자 안에는 수많은 시인묵객의 글이 걸려 있는데 그 가운데 창석 이준의 시를 차운한 신즙의 글이 작은 편액으로 남아 있다.

‘망운정의 유적에서 가풍을 보겠으니/ 감개한 속에 풍수당이 이루어졌도다 (중략) 조석으로 아버지 보살펴드리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노라.’

광해군 12년인 1620년 8월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신즙은 모친을 용궁(龍宮) 하풍(河)에 장사 지내고 ‘하음(河陰)’이라 자호(自號)했다. 하풍은 안동 임청각 앞의 견항진(犬項津) 물길과 예천의 사천(沙川) 및 성화천(省火川)의 물이 용비산 아래에서 합쳐지는 자리다.

인조반정 이후 신즙은 구례현감이 되었다. 그리고 인조 2년인 1624년 2월, 부인 홍씨가 세상을 떠났다. 인조 4년에는 형조 좌랑에 오르고 그해 8월, 강원(江原)도사(都事)가 되었다. 강원도에 있었던 시간은 짧았지만 그는 관동(關東)의 여러 경승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관동을 노래한 글은 매우 많고 그 역사도 깊다. 그러나 현재의 ‘관동팔경’과 동일한 것은 신집의 ‘영관동팔경(詠關東八景)’에서 최초로 발견된다. 학계에서는 신즙 이후 관동팔경이 정형화되었다고 추정한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신즙은 징병과 군량을 조달하고 흩어진 백성들을 안집(安集, 백성을 편안하게 함)시키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정묘호란 전후의 시기에 병력 군수 군비 등 작전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 겸염철사(兼鹽鐵使)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영동(嶺東)을 순찰하며 글을 남겼고, 금강산을 유람하며 ‘유금강록(遊金剛錄)’도 썼다. 1628년 공조 정랑, 형조 정랑이 되었고 영사(寧社)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이어 무안(務安) 현감(縣監)으로 일하다가 1635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고향에서 거의(擧義, 의병을 일으킴)하였으나 삼전도의 굴욕으로 해산했다. 1637년에는 한성부(漢城府) 서윤(庶尹)이 되었다가 곧 형조 정랑이 되었다. 1638년 사예(司藝)가 되고 곧이어 공주(公州) 목사(牧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다. 인조 17년인 1639년 사복사정(司僕寺正)에 올라 말과 옷감, 근사록 등을 하사받았다. 신즙은 그해 8월 밀양(密陽) 부사(府使)가 되어 부임하기 전 고향에 갔다가 갑자기 사망했다.

#3. 하음집

우복 정경세가 쓴 조부 신연의 행장에 따르면 신즙은 처음에 사정(司正) 홍덕록(洪德祿)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을 두지 못했다. 뒤에 다시 생원(生員) 김계(金繼)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두었다고 한다. 신광하(申光夏)다.

특히 신즙은 많은 글을 남겼다. 조준도의 방호정과 정영방의 거처였던 영양 서석지(瑞石池)에도 신즙의 글이 새겨져 있다. 벗들과 나눈 시들, 스승과 주고받은 편지들, 세상을 유람한 기행록들, 전쟁의 상황을 적은 기록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들,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 등은 ‘하음집(河陰集)’으로 엮여 있다. 1622년에 청송의 향민들을 대신해 지은 ‘정비변사진폐문(呈備邊司陳弊文)’도 있다.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이다. 그가 쓴 많은 글들은 아들 신광하가 수습해 30여 권으로 정리해 두었는데 상란(喪亂)을 겪으면서 태반이 흩어져 사라졌다. 문집의 초간(初刊)은 순조 때인 1825년에 이루어졌다. 매우 희귀한 것으로 보아 소량만을 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헌종 1년인 1835년에 7세손 신홍좌(申弘佐)가 목판으로 다시 간행했다. 책 표지 안쪽에 ‘송학서원인송(松鶴書院印送)’이라고 필사(筆寫)되어 있어 청송의 송학서원이 간행 장소라 여겨진다.

1639년 12월, 신즙은 용궁(龍宮)의 몽미(夢美)에 묻혔다고 한다. 몽미가 어느 곳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머니가 누워 계신 용궁의 하풍 언저리가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다. 그의 생애 동안 그리고 사후에도 그의 이름 가진 정자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불천위(不遷位) 묘당(廟堂)도 있는 듯하나 실체를 알 수 없다. 흐르는 강물 같은 이었다. 제문은 정영후가 썼다. 정씨 형제는 자신들보다 어린 신즙의 죽음을 매우 애통해했다고 한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문헌=청송군지. 청송군 홈페이지 자료. 예천유학사. 하음집 한국문집총간 해제.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자료. 평산신씨판사공파사이버종회 자료.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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