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천국서 지상으로 길 내는 자'…있어도 없어도 되는 것 같은 존재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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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0-23   |  발행일 2020-10-23 제34면   |  수정 2020-10-23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시인' 안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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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갓 등단했을 무렵 구입한 외딴 집. 낮술도 지인들과의 만남도 시들해지고 미래를 향한 지적 자양분이 황량하다 싶을 때 그는 면벽수도승의 맘으로 서재에 들어 책을 읽는다. 군데군데 보이는 젊은날의 사진들도 그의 지켜주는 호위무사라 할 수 있다.

밥이 시들하면 막걸리로 끼니를 해결할 때가 많다. 낮술은 선천성 외로움을 견디게 하는 든든한 우군이다. 지금도 냉장고에는 안동 막걸리가 여러 병 출격을 위해 대기 중이다. 타지로 갈 일이 없을 때는 시내 팔도상회·달항아리·옛촌의 주탁에 앉아 있을 것이다. 옛촌 여사장은 고맙게도 내 시 '아배생각'을 액자로 걸어놓았다. 아배는 자주 시심의 도화선이 된다.

'니 오늘 외박 하냐/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또 부자가 길에서 어색하게 조우한다. '야야, 어디가노/ 예…, 바람 좀 쐬려고요/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1988년 3월에 마련한 한 뼘만 한 집. 지나가는 바람은 내게 꼭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등장할 법한 집이라 일러준다. 나도 곧잘 그 시를 드문드문 읊조려 본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중략)/ 내 어리저런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이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풀집 같은 단출한 기와집 한 채. 근처에 20여호의 집이 들국화처럼 피어있다. 서재 복판에 침대를 놓아뒀다. 책을 읽다 졸음이 밀려들면 그 자리서 잔다. 이른 술이 이른 아침을 몰고 온다. 청동빛 감도는 새벽에 깨어날 때, 나는 시베리아보다 더 북방, 툰드라 지대 자작나무처럼 뜰 앞에 나선다. 바람이 나무와 교신하는 걸 엿듣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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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농사꾼으로 일관해 온 동화작가 권정생이 안상학을 위해 외로움을 큰 자산으로 알고 살아라는 덕담을 담아 보낸 육필 편지.

◆ 6번째 시집이 나오고

시마(詩魔)는 화산의 분화구 같아서 시심(詩心)이랄 수 있는 용암을 한없이 멀리 내보낸다. 다행히 아직 내 분화구는 작동 중이다. 작동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마중물을 부어야 된다. 적당량의 외로움, 적절한 가난, 그리고 일용할 여행, 여기에 누룩 같은 술추렴을 보태야 분화구는 재발진. 점화가 종멸해버린다면? 그럼 시도 없을 터. 언젠가 나도 사화산 같은 시인의 날이 올 것이다. 그럼 접어야지 시를. 그럼에도 시인이라고 우긴다면 그는 능히 죽은 손자 불알 만지듯 시가 없는 시를 갖고 코스프레 할 것이다. 그런 시인일수록 시보다 자기를 더 멀리 송출할 줄 안다.


화산의 분화구와 같은 詩魔
작동 기미 없으면 마중물을
언젠가 나도 사화산 될 것

월부책장수였던 형 덕분에
집안엔 문학전집·詩選 가득
그것들 읽으면서 일상 잊고
그 망각의 소실점에는 '詩'
안동여고생 류향의 시 읽고
문학청년의 습작기 막 올라



지난 9월8일 나의 제6시집이랄 수 있는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이 출간됐다.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생각'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에 이은 시집이다. 최근 '시와 희곡'이란 문예지 특집란에 생살 같은 10편의 시를 골라주었다. 그 첫 수가 내 마음의 종착역 같은 '북녘거처'다. 도저히 고향은 사람 살 동네가 아니었다. 고향과 가족에 더 절망했다. 1978년 여름 안동역, 청량리행 열차는 러셀의 '행복론'이란 책을 품은 17세 소년을 태우고 서울로 간다. 지금은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에 편입된 서울 상계동 불암산 자락. 가짜 보석을 찍어내던 프레스가 있던 작은 공장, 비만 오면 질척거리던 거기 낮은 지붕 아래서 생애 첫 시를 끄적이던 시간이 빗물처럼 고였다.

예술은 위대한 미학적 돌파구가 아니었던가. 형은 월부책장수였다. 자연 세계위인전, 세계문학 한국문학전집, 세계 명시선 등이 집안에 굴러다녔다. 난 그걸 읽으면서 지랄 맞은 일상을 망각했다. 그 망각의 소실점에 시가 있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운명의 시 한 편이 내게 온다. 유명 시인의 시가 아니라 당시 안동여고생 류향의 작품이었다. '밤에만 우는 들국화'란 시였다. 비록 우는 들국화지만 먼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내용인데, 우는 그 들국화, 그게 바로 나라고 믿었다.

◆나의 문학청년시절

그때부터 문학청년. 그리고 습작기의 대장정이 이어졌다. 나의 문학적 도약대는 안동이 아니라 대구였다. 이미 나는 집이 없는 사내라 여기고 고향을 떠났다. 객지 생활은 얼추 10년. 서울, 대구, 그리고 포항이었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 그리고 6·10항쟁, 직선제개헌, 야권단일화 정국과 맞물린 1987년. 난 대구에 있었다. 한 손에는 돌멩이, 한 손에는 시가 들려져 있었다. 낮에는 제3공단 등에서 노동투쟁을 하고 6·10항쟁 때는 지랄탄이 목구멍을 위협하는 거리로 달려나갔다. 염매시장 곡주사의 흐린 불빛의 정서를 품고, 밤이면 원고지 앞에 만년필로 앉았다. 당시 대구는 시인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영혼들에겐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박상봉이 리더했던 시인다방에 자주 들렸다.

나는 지상에서 가장 더럽고 죽음의 하천이 된 신천을 몸소 체험했다. 김대중·김영삼·백기완이 야권 단일 대통령 후보를 낼 수 없었던 우리의 암울한 정치판과 다를 바가 없었다. 노태우에게 질 것 같았다. 처음에는 신천동 달동네에 암거했다가 선거 패배를 예감하며 그걸 모티브로 신춘문예 돌파용 시를 완성시키고 싶었다. 계명대 뒷담 근처 사글세 방에 배수진을 쳤다. 야권이 선거에 지고 난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젊은 날의 그 신산스런 날들이 응축된 그 시가 바로 '1987년 11월의 신천(新川)'이다.


1987년 야권은 대선에 지고
이듬해 나는 신춘문예 당선
그시절 분노 가득했고 창조적

네 발로 와 두 손으로 살다가
네 발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
앞발은 군림을 위해 손 된다
한 없이 슬퍼보이는 내 손
두 손 털고 네 발로 기기에는
이미 세상은 너무 직립 공간



'신천교가 보이는 길목을 지켜선/ 가로수는 하나둘 가을흔적을 지우고/ 팽팽하게 바람을 안고 있는 선거현수막은/ 가지를 붙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하략)'

대구에 머물렀던 1987~90년, 내 인생에서 가장 실천적이고 가장 분노 가득했고 가장 창조적이었던 날들이었다. 난 투사의 길을 뒤로하고 시인의 길로 들어선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처지. 그 울분, 그 서글픔, 그 분노 같은 게 날 시인으로 인도한 것 같다. 시인은 지상에서 천국으로 길을 내는 자가 아니라 '천국에서 지상으로 길을 내는 자'다. 그러니 직업도 아니고 사상·사명도 아니다. 있어도 되는 것 같고 없어도 되는 것 같은, 구름 속 구름 같은 존재다. 그리고 천국과 지상 사이에 놓인 시대와의 불화. 그걸 심장으로 장착한 자가 바로 시인이 아닐까. 갑과 을이 충돌하는 그 시대가 보이지 않고 어울렁더울렁, '시절타령'만 보인다면 그런 시는 한갓 장식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이 형용사이거나 부사로 기울라치면 나는 시인과 정반대의 길을 갔을 것이다. 시인은 명사이고 동사여야 된다는 믿음을 아직도 져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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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1988년 등단한 이래 모두 6권의 책을 펴냈다. 그리고 초대 전농회장을 지낸 영덕 출신 농민운동가 권종대의 삶도 한 권의 평전으로 그려내기도 했다. 그리고 동심도 존중해 '지구를 운전하는 엄마'란 동시집도 출간했다.

◆마음과 몸, 손과 발의 연대기

'마음과 몸이 한통속일 때 가장 자유롭다고. 삶이 깊은 바다에 이를수록 고독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고독이 고독하지 않도록 마음의 방향을 내 안 더 깊은 곳으로 인도할 것. 높은 봉우리에 오를수록 더 고독한 것. 아픈 것은 상처가 나아가는 과정. 내 몸은 내 몸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내 몸은 내 몸을 풀어 줄 수도 없으니 몸속 가장 먼 마음에라도 기대며 살아야 한다.'

이 시대의 손이 슬퍼 보인다. 손이 실은 발임을 고발하고 싶었다. '내 손이 슬퍼 보인다'란 시는 그렇게 완성이 되었다.

나는 오늘 내 손이 슬퍼 보인다. 개에게 과자를 주려고 손 내밀면 개는 어김없이 뒷발로 서는 앞발을 허우적거린다 그 앞발이 무언가 얻으려고 안달하는 내 손인 듯하여 문득 과자를 든 내 손이 서글퍼 보이는 것이다. 좀처럼 꺾어지지 않는 직립이 불편하다.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한다. 아니다. 사람은 손 없이 왔다가 손 없이 가는 것이다. 보라, 기어 다니는 아이까지는 손이 아니라 발이다. 똥을 뭉개는 저 기어다니는 노인의 손도 손이 아니라 발이다. 사람은 네 발로 와서 두 손으로 살다가 네 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두 손으로 사는 동안 잘난 사람들의 손은 악마적이다. 앞발이 손이 되는 것은 대체로 소유를 폭력을 군림을 위해서다. 두 손으로 사는 동안 못난 사람들의 손은 더 악마적이다. 대체로 자본 앞에서 빌어먹기 위해서 싹싹 빌기 위해서며 두 손 들기 위해서다. 두 손으로 사는 동안 극한에 가서는 악마적인 손과 더 악마적인 손이 부딪친다. 빌어먹던 손이 찬탄하며 소유의 손이 되기도 하고, 싹싹 빌던 손이 칼을 빼앗아 들고 살수를 휘두르기도 하고, 항복하던 손이 권력의 숨통을 끊고 군림하기도 한다. 두 손의 역사는 끊임없이 싸움을 재생산하는 역사다. 나는 오늘 배가 부르면 이내 발로 돌아가는 저 순하디순한 개의 손을 보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손이 슬퍼 보인다. 그렇지만 개가 두 발로 오래 서 있지 못하는 것은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니래도 손이 자유로운 것이 많아서 어지러운 세상에 개마저 그리된다면 끔찍하다. 과자를 주면 이내 네 발로 돌아가는 저 단순한 동물이 오늘 따라 한없이 예쁘기만 보인다. 꼬리를 흔들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저 개와 섹스라도 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는 오늘 분명 내 손이 슬퍼 보인다. 빼앗길 것도 없고 빼앗고 싶지도 않는 내 손이 한없이 슬퍼 보이는 것이다. 두 손 탈탈 털고 네 발로 기어 다니기에는 이미 세상은 너무나 직립 공간인 탓이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허우적거리는 내 손이 슬프다.

그리고 30년 이상 봇짐처럼 지고 온 내 구절양장 같은 모든 심사는 내 시 '안동소주'로 대신하기로 한다.

'까무룩 안동소주에 취한 두어 시간 잠에서 깨어나 머리 한 번 흔들고 짚세기 고쳐 매고 길 떠나는 등짐장수를 따라 나서고 싶다. 안동소주 한 두루미에 한 사흘쯤 취해 돌아갈 길 까마득하게 잊고 마는 나는 그런 주막이 그립다' 그런 세상이 다시 올까?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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