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왜 다시, 홍의 장군 곽재우인가 .3] 진주성 전투 그리고 그의 강직한 성품

  • 백승운
  • |
  • 입력   |  수정 2020-12-16  |  발행일 2020-12-16 제면
의병 200명과 포위된 진주성 지원…심리전으로 왜군 3만명 저지

성 북쪽 비봉산서 나팔 불고 북치며 교란 "1만 구원병 온다" 소문 퍼뜨려

6일간 혈전 이기고 '곡창지대' 호남 길목지켜 경상우도 핵심 지휘관 등극

목숨 부지에 급급했던 경상감사 김수와 대립…서로 "목 베야 한다" 주장

관직 놓고 낙향했지만 정유재란 앞두고 복귀, 현풍 석문산성 쌓고 활약

2020121401000496200019851
곽재우가 정유재란 전에 쌓기 시작한 현풍 석문산성. 곽재우는 의병활동 초기부터 적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산성이라 믿었고, 이를 조정에 수차례 제안하기도 했다.

#1. 잇단 승전에 경상우도 방어 핵심 지휘관으로

곽재우는 1592년 5월 정암진 전투 승리 후 연전연승했다. 7월에는 현풍·창녕·영산 등지에서 승리하며 경상우도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침입을 막았다. 적에게 투항해 길잡이 노릇을 하던 공위겸을 체포해 처형하기도 했다.

왜군은 잠시 주춤했다. 곽재우에게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탄 홍의장군이 나타나면 혼비백산했다.

계속된 승리였지만 곽재우는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지 않았다. 자만에 빠질 때면 칼을 어루만지며 마음을 다잡았다. 의병들에게도 당부했다.

"적은 언제든지 다시 올 것이다. 방심하고 자만하는 순간 모든 것은 허사가 되고 만다."

2_진주성
선조수정실록에는 진주성 전투에 대한 전황이 상세히 나온다. 실록에는 김성일이 의병장 곽재우·이달 등을 보내어 진주를 구원한 것을 요청한 내용이 적혀 있다.

잠시 주춤하던 왜군은 다시 호남을 호시탐탐 노렸다. 곡창지대였던 호남은 조선도 왜군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군대 전체를 먹이는 곡식을 모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진주는 호남을 지키는 전략 거점이었다. 호남으로 가는 길목으로, 진주가 뚫리면 나라의 운명을 장담할 수 없었다. 왜군이 진주 진격을 꾀하는 이유였다.

마침내 10월5일(음력) 나가오카(長岡忠興) 휘하의 왜군 3만명이 호남 진격을 위해 진주성으로 밀어닥쳤다. 성은 곧 포위되고 말았다. 아군은 약 8천600명(문헌마다 아군과 왜군의 숫자가 다소 차이가 있다). 수적 열세였다. 중과부적이었다. 게다가 적은 오롯이 정예병이었다. 아군은 농사를 짓다가 삽을 들고 쫓아온 의병까지 모두 합한 숫자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왜군이 진주성을 포위했다는 소식은 곽재우에게 빠르게 전해졌다.

'지금 당장 진주로 간다.'

곽재우는 의병 200명을 이끌고 급히 의령을 빠져나와 들판을 가로질렀다. 장군의 붉은 옷이 휘날릴 때마다 의병들은 기세를 올렸다. 찬 기운이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달아오는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진주성에 도착은 곽재우는 성 밖에 진을 치고 때를 기다렸다. 진주목사 김시민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혈전을 거듭하며 성을 방어했다. 성을 차지하려는 전투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왜군은 수천 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연일 위협했다. 아군의 칼과 창은 단호했다. 넘어오는 적의 목숨을 닥치는 대로 끊으며 성을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3만의 적은 물러서지 않았고, 수적 열세에 놓인 아군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10월5일 밤, 곽재우의 의병은 성에서 북쪽으로 1㎞ 떨어진 비봉산에 올라가 진을 쳤다. 심대승에게 선봉장을 맡기고 의병들에게는 횃불을 들게 했다. 동시에 나팔을 불고 포를 쏘고 북을 치며 적을 교란시키게 했다. 심리전이었다.

나팔 소리가 짙은 어둠을 갈랐다. 곧이어 북소리가 울렸다. 나팔과 북소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포가 날아들었다. 곧이어 큰 외침이 일제히 들려왔다.

"1만 구원병과 의령 홍의장군이 합세해 내일 아침에 적들을 죽이러 온다!"

성안의 조선군도 기세를 올렸다.

"홍의장군이 온다! 홍의장군이 합세한다!"

2020121401000496200019853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7일 갑오 첫 번째 기사. 의병장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의 격문사건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성 안팎에서 요동치는 소리에 왜군은 혼비백산했다. '홍의 장군이 온다'는 말에 밤새 잠들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심리전은 성공적이었다. '홍의장군'이라는 말만 들어도 적은 주눅 들었다. 진주성 전투가 한창일 때 호남지역의 의병이 인근 산청에 진을 쳤는데 이는 진주성과는 무관한 병력이었다. 그런데도 정탐하던 왜군들이 홍의장군과 합세하러 온 구원병인 줄 알고 놀라 달아나기도 했다. 홍의장군은 적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6일간의 대접전은 조선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김시민이 적의 총탄에 전사했지만, 경상우도를 보존하고 왜군의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곽재우가 참전한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기강전투와 정암진 전투를 시작으로 진주성 전투까지 승승장구한 곽재우는 전공을 인정받아 벼슬을 받았다. 승진도 계속됐다. 그는 유곡찰방(1592년 6월·종6품)·형조정랑(8월·정5품)을 거쳐 경상도 조방장(助防將·정3품)에 임명되었고, 1593년 4월에는 성주목사에 제수됐다. 왜란이 발발한 지 1년 만에 곽재우는 경상우도 방어에 핵심 역할을 하는 지휘관에 오른 것이다. 1594년 12월에는 격전지 중 한 곳인 진주목사에 임명되었고, 경상도 관찰사·경상우수사 같은 요직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2.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

곽재우는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본격화되던 1595년 가을, 돌연 관직을 버리고 본향인 현풍으로 낙향했다.

승전을 거듭하며 중용되던 의병장이 갑자기 낙향한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유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그의 강직한 성품 때문이었다. 경상감사 김수와 벌인 격문사건은 그의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감사는 김수였다. 그는 전란 중에도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왜군이 침략한 1592년 4월13일부터 한 달 동안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부하들에게는 나가 싸우라고 다그치면서 정작 본인은 뒤로 물러나 있었다. 5월15일부터는 임금을 모시는 근왕군으로 나간다며 경상도를 떠났다. 근왕군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런 그가 6월15일 경상도로 다시 돌아왔다. 김수가 돌아왔다는 소문에 곽재우는 분노했다.

'처음 왜적이 왔을 때는 조금도 방어할 계획이 없었고 근왕군에서는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의리를 몰랐으니 어찌 감히 얼굴을 들고 다시 왔는가. 나는 군사를 옮겨 먼저 그를 쳐야 하겠다.'(난중잡록 1592년 6월19일)

곽재우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김수의 목을 칠 기세였다. 성난 눈이, 악에 찬 고함이 허공을 갈랐다. 그의 분노는 사사로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충과 절의를 지키지 않는 못난 신하에 대한 꾸짖음이었다. 제 목숨만 부지하려는 벼슬아치를 향한 엄중한 경고였다.

분노를 참지 못한 곽재우는 김수에게 격문을 띄웠다. 격문을 받아든 김수도 격문으로 응수했다. 서로 역적이라며 목을 베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정에서도 난감했다. 전란 중에 경상감사를 쉽게 교체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곽재우를 문책할 수도 없었다. 격문 갈등은 갈수록 격해졌다.

결국 초유사 김성일이 중재에 나섰다. 그는 곽재우를 지켜야 했다. 곽재우의 인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터였다. 더욱이 전란 중에 반드시 필요한 인재였다. 하지만 초유사는 감사보다 직책이 아래였다. 김수가 지시하면 김성일은 따라야 했다. 하지만 김성일은 '곽재우를 잡아 가두라'는 김수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임금에게 곽재우를 옹호하고 현지 상황을 설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김수에게는 편지를 보내 구슬렸다. 김성일의 중재로 격문사건은 무마됐다.

곽재우의 강직한 성품을 임금 선조는 못마땅해했다. 우유부단하고 심약한 선조가 그의 진심을 알 리 없었다. 김수와의 격문갈등 때도 선조는 "곽재우가 함부로 감사를 죽이려고 하니 도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지만 귀한 인재를 조정에서 내버려둘 리 없었다. 1597년 왜란이 다시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나라에서는 곽재우를 불렀다.

곧장 현풍 석문산성 신축 업무가 주어졌다. 그는 의병활동 초기부터 산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적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산성이라 믿었다.

그해 7월 석문산성이 완성되기 전, 왜군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략했다. 정유재란이었다. 곽재우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병사를 거느리고 화왕산성으로 들어가 성을 지켜냈다. 전란에서 곽재우의 활약은 여기서 끝이 났다. 복상(服喪) 때문이었다. 그해 8월 계모 허씨가 별세하자 그는 현풍 선영에 장사 지낸 뒤 울진에서 삼년상을 치렀다. 나라의 부름이 계속됐지만 그는 상중이라며 거절했다. 이듬해인 1598년 11월 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 전쟁은 막을 내렸다. 탈상한 곽재우는 1599년 10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종2품)에 임명되어 그 지역의 군무를 총괄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당시로서는 노년의 초입에 접어든 나이였다.

글=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망우당 곽재우,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남명학교양총서 21. 조선왕조실록.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