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뉴스] 대구 서재리에서 '놀삶' 아이들이 만난 마을의 '왕할머니'

  • 진정림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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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5-17   |  발행일 2021-06-02 제12면   |  수정 2021-06-02 07:58
할머니의 살아온 이야기에 빠져들며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신기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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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놀삶' 아이들과 엄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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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놀삶' 아이들과 엄마들.

"이집은 초가집이었는데 매년 지붕을 해 이었어. 그라모 굼벵이 이만큼이나 크다란기 막 기어 나왔어. 그기 당뇨에 좋다고 끓여먹고 그랬어. 그라고 기와 올렸다가 인지는 철로 덧댄기라."

"마실에 샘이 하나 뿌이라가 큰 장독만한 통에 물을 길어가 머리에 이고 왔어. 비가 오마 미끄러버서 신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걸어왔어."

대구 달성군 서재1리 217번지로 시집을 와서 63년째 살고 계시다는 유하분(85·서재1리 마을회관 노인회 총무) 할머니가 풀어놓은 이야기 보따리에 아이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한다. 이야기와 함께 꺼낸 앨범 속에는 비녀 찌른 시어머님 초상화부터 5남매 학창시절 과 웨딩드레스 입고 결혼식한 사진, 손주들 돐 사진까지 유할머니의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와 가까운 거리에 오래된 돌담집과 함께 전래동화에나 나올 법한 할머니의 살아온 이야기에 빠져들며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신기해했다. 할머니의 연세를 듣고 아이들은 바로 '왕할머니'라는 별칭을 만들어 드리기도 했다.

지난 13일 마을메이커스페이스 '놀삶'(이하 놀삶) 아이들과 엄마들은 서재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살고 계시는 어르신 중 한 분을 찾아뵙고 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앞서 올해 1월 아름다운 재단의 '변화의 시나리오'라는 사업에 놀삶이 '신구주민을 잇는 삶마을학교' 란 주제로 공모, 선정됐다.

달성군 다사읍 서재본1길 7번지에 위치한 협력적 주거공동체 1층을 이용하는 놀삶은 아이들과 그들의 엄마들이 주체가 된 품앗이 교육 단체다. '놀이가 삶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라는 케치프레이즈에서도 느껴지듯이 재미나게 놀기 위해 아이들이 스스로 놀이규칙을 정할 정도로 놀이를 통해 자연스레 배려와 존중을 배워가고 있다. 그러던 중 놀이의 범위를 확대해 동네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더 훌륭한 놀이가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서재지역은 8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서재초등학교가 있을 정도로 오래된 마을이다. 대구 도심 외곽의 작은 농촌 마을인 서재에 근래 몇 십년간 아파트촌이 급격하게 형성돼 젊은 인구가 대거 유입됐지만 세대를 아우르는 광장의 역할을 하는 공원이나 규모 있는 시장이 조성되지는 못했다. 신구세대가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만남의 광장'이 없으니 젊은 엄마들과 아이들은 마을의 원래 주인이었던 마을 어르신들과 친해질 기회가 드물었다.

놀삶 강미영 대표는 "처음에는 놀삶 공간으로 모셔서 발마사지, 어르신 요가 등을 해보려 했으나 코로나 상황에서 조심스러워 이장님께 경로당 어르신들을 소개 받아 한 분 한 분 찾아 뵙고 있다. 강사가 돼달라는 부탁에 손사래를 치셨지만 그저 마을에서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을의 역사 선생님이 되신다고 부탁드렸더니 선뜻 승낙을 하셨다"라며 "마을에서 사람과의 관계를 만드는 역할을 놀삶에서 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4월부터 시작되어 올해 11월까지 20차시에 걸쳐 진행될 '변화의 시나리오' 커리큘럼에는 마을강사님과 텃밭에 열무씨를 함께 뿌리고 수확해 물김치 담궈보기, 놀삶 근방에 사시는 어르신 댁 마당에서 들풀로 천연염색 해보기, 마을의 폐지수거 어르신과 함께 마을골목 지도 만들기, 이장님과 함께 옛날 놀이 배우기, 어르신과 핸드드립 커피 배우기, 치킨집 사장님께 폐식용유를 얻어 재활용 비누 만들기, 전연령층 대상 스마트폰 다루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글·사진=진정림 시민기자 truefores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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