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눈으로 보는 G2] 아메리칸 드림은 유효한가? 미국의 매력과 불안

  • 변영학 대구가톨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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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5-24 15:16  |  수정 2021-05-24 16:57

‘아메리칸 드림’은 더 이상 꿀 수 없는 꿈이 됐는가. 미국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이 ‘동경’에서 ‘불안’으로 바뀌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1. 자유민의 탄생
현대문명은 전통적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오는 근대화 과정의 결과물로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경험은 흥미롭다 하겠다.

정치적 근대화를 위해선 제왕의 권력을 시민과 그 대변자인 의회로 이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순순히 권력을 넘겨줄 리 없다. 이 때문에 피지배자의 저항과 폭력은 필연적이고 자연스럽다.

파리 시민은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루이 16세를 처형했다. 영국은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왕권을 제한했다. 러시아 혁명은 니콜라이 2세를 처형하고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했다.

미국도 다르지 않다. 영국 출신 이주자들이 식민지 독립을 위한 혁명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지 3세의 억압적 통치를 종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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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티 파티 사건(Boston Tea Party, 1773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식민지 미국에 수출한 차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였던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이 인디언 복장으로 위장하고 차 상자를 바다에 버렸다. 이는 미국 독립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출처: 위키피디아


근대화는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도 권력 이동이 불가피하다. 산업자본가는 토지 귀족에게 봉건적 권력을 넘길 것을 요구했다. 서유럽은 대체로 1750년부터 1850년까지 약 100년의 산업화를 통해 토지에 묶인 농업경제를 도시 공장이 주도하는 산업경제로 탈바꿈시켰다.

예컨대 영국의 도시산업가들은 당시 외국 농산물 수입을 제한하는 곡물법을 폐지함으로써 토지 귀족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켰다.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는 사회주의적 토지 개혁을 통해 지주의 토지를 몰수했다.

반면 미국은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신대륙에 펼쳐진 무한한 땅을 개발하면 됐기 때문에 애초에 토지에 기반한 봉건적 구질서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노예노동과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을 바탕으로 발달한 남부 지주세력은 상공업이 발달한 북부 세력과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결국 서부 세력과 동맹을 맺은 북부군이 남북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미국은 일종의 산업국가를 선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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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든 흑인병사들= 약 20만명의 흑인병사들이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군에 가담해 싸웠다. 출처: 미국의 목소리(Voice of America)


2. 최초의 정치적 실험과 성공
혁명적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인은 세계사에 유례 없는 국가 건설의 방향과 내용을 두고 고민했다.

왕정 복고는 이미 식민지 독립전쟁을 통해 역사적 대안이 될 수 없었다. 분절적이고 협소한 도시국가에 한정됐던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 역시 엄청난 수의 시민이 광활한 땅에 모여 사는 미국에는 걸맞지 않았다.

미국의 계몽 엘리트는 봉건적 구속이 없는 새로운 백지에 정교하게 설계된 권력장치를 그려 넣는 최초의 정치적 실험을 감행했다. 이 거대한 정치공동체는 '인민주권'과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틀 위에 연방정부와 주정부, 큰 주와 작은 주, 상원과 하원, 그리고 입법·사법·행정 간의 견제와 균형을 장착했다.

각 주정부가 파견한 대표들은 오랜 토론과 타협을 통해 1787년 필라델피아 헌법제정회의에서 헌법을 완성했다. '최초의 신생국가(first new nation)'라 할 미국은 국가 형성 과정에서 계급투쟁의 산물인 급진적 상처나 보수적 반동의 결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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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헌법 선포(1787년)= 1787년 9월17일 조지 워싱턴이 사회를 본 필라델피아 헌법제정회의에서 미국 헌법이 선포됐다. 출처: 위키피디아


3. 정치·경제의 양극화
그렇다면 근대화의 보편적 경로를 걸어와 20세기부터 지구촌을 지배해 온 미국의 매력은 무엇인가.

봉건적 구(舊)체제 없이 비교적 자유롭게 건설된 미국은 집단이나 계급적 정체성에 구속되지 않는 '개인주의'와 이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평등주의'가 오랫동안, 그리고 강하게 지배해 왔다.

여기에 더해 거대한 대지, 계층상승의 이동성, 경제적 풍요 등은 미국을 그야말로 ‘기회의 땅’으로 만들었다. 동부지역 저소득층은 미개척 상태에 있던 중부와 서부의 땅을 개간하기 위해 ‘Go West’를 외쳤다. 경제적 불평등은 언제나 넓은 대지에 의해 희석됐다.

이를 지켜본 세계는 미국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등 구세계의 건강하고 열정적인 노동력은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이민 대열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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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 백인 중산층, 4인 가족, 넘치는 식료품, 바비큐 그릴, 잔디 깍는 기계, 요트, 여성 가사노동으로 가득한 미국의 꿈이다. 노동이 끝난 휴일의 여유와 행복이 다소 과잉된 노란 색 톤에 스며 있다. 출처: 마켓워치


그러나 1980년대 들면서 ‘드림’은 급속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실제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 75%가 ‘아메리칸 드림’은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무엇보다도 불평등 심화가 결정타였다. 미국의 최근 몇 년간 지니계수(소득 불균형 상태를 나타내는 계수로, 0에 가까울수록 소득분포가 평등한 것으로 판단함)는 가장 높은 0.39를 기록했다. 이는 주요 선진국 클럽 중 최악 수준이다.

제조업과 조직노동의 쇠락, 글로벌화와 금융자본주의의 부상, 복지체제와 재분배정책의 미흡 등은 미국 불평등을 더욱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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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회원국 지니계수= 2019년을 전후한 OECD 회원국의 지니계수를 보면 칠레(0.46), 멕시코(0.458), 미국(0.39), 영국(0.366), 한국(0.345) 순으로 불평등이 심하다. 반면 슬로베니아(0.249), 벨기에(0.258), 스웨덴(0.275), 독일(0.289)은 불평등이 약한 편이다. 중간 수준의 불평등에 해당되는 국가는 프랑스(0.301), 호주(0.325) 포르투갈(0.317), 캐나다(0.303) 등이다. 출처: OECD


보수적 정치인은 차별과 혐오의 레토릭으로 백인 저소득층의 불안을 조직하는 데 열을 올렸고 결국 성공했다. 개혁적 엘리트조차 말로만 분배정책을 떠들었을 뿐이다. 그 결과 클린턴·오바마 민주당 정부 하에서도 불평등은 전혀 개선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했다.

 

경제적 양극화는 정치적 양극화와 동시에 발생했다. 상원(Senate)과 하원(House)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이념적 거리는 1990년대 이후 가장 심각하게 벌어졌다. 정치 엘리트의 양극화는 타협과 협력을 어렵게 만들었고, 무엇보다 시민과 지지자에게 오해와 불신을 조장하는 기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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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의 이념적 거리= 1929년 대공황 이전에는 양당 간의 정치 양극화가 심했지만, 대공황에 직면한 정치권의 대응으로 양극화는 상당히 해소되었고 이후 2차 대전과 냉전, 아메리칸 드림 시기 동안 지속되었다. 1990년대 중반 공화당 깅그리치 하원의장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이념 대립이 심각해졌다. 상원(Senate)이 하원(House)보다 정치양극화가 다소 약한 것은, 상원은 당파적 열정에 빠지기 쉬운 하원을 견제하는 계몽적 귀족주의 분위기가 있어 정치사회의 대치와 갈등을 조정 및 완충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출처: Jeff Lewis, 2020, Polarization in Congress


민주당원은 공화당 지지자들이 모두 노인, 부자, 백인우월주의자, 기독교 근본주의자, 마초주의자, 혐오주의자로 가득 차 있다고 믿게 됐다. 반면 공화당원은 민주당이 동성연애자, 급진사회주의자, 노동조합원, 무신론자에 기반한다고 믿는다. 

 

지난해 말 연방의회에 난입했던 트럼프 지지자들의 폭동은 정치적 양극화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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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국은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불안하다. 물론 세계 어느 나라인들 빛과 어둠이 공존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미국이 더 궁금해진다.

 

변영학 <대구가톨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 텍사스주립대(오스틴)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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