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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지연 대구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 |
오월도 끝을 향해가는 요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럴 때 떠올려지는 것이 기차역이다. 기차역을 오가는 많은 사람의 사연이 제각각이듯, 기차는 그러한 다양한 삶의 모습과 사연들을 싣고 오간다. 문학이라는 것이 매우 다양한 인생의 흔적들을 담으면서 이 삶과 저 삶을 옮겨 다닌다는 점에서, 기차나 기차역은 문학의 메타포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소설에는 기차나 기차역을 매개로 다양한 서사를 전개하는 장면이 많다. 이광수의 '무정'에는 주인공 형식이 기차를 보며 '근대'라는 새로운 감각을 얻고, 염상섭의 '만세전'에는 식민지 조선을 살아가는 비루한 현실이 경부선 기차 위에 놓여있다. 특히 대구 출신의 현진건이 쓴 '고향'은 대구 인근에 살던 주인공이 동양척식회사에 땅을 빼앗기고 만주와 일본 등지를 떠돌며 겪은 수난사를 재현하고 있다. 부랑자처럼 방황하는 주인공에게서 '조선의 얼굴'을 발견한 화자(話者)는 바로 대구역에서 경부선 열차에 올랐다. 당시 대구역은 근대 도시 대구의 중심지로서 일본인들의 근대 상권이 발달한 곳이며, 대구역을 중심으로 한 상권의 형성은 광복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러한 대구역을 소설에 담은 작가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김원일은 자전적 소설인 '마당 깊은 집'을 쓰면서 주인공 길남의 주요 활동지로 대구역을 그려놓았다. '마당 깊은 집'은 6·25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은 주인공이 '애비 없는 집의 가장' 역할을 하는 소년의 성장을 다룬 소설이다. 소년 길남의 눈을 통해 그려지는 전후의 생활상, 특히 대구를 중심으로 재현되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신문배달을 하는 길남의 배달지역이 '중앙통 일대, 송죽극장 주위 다방, 양키시장, 대구역' 등인데, 그중에서 대구역은 지친 길남이 소일하며 시간을 보내는 장소다. 교복을 입은 같은 또래를 볼 때마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던 길남은 대구역전에서 구걸하는 거지와 실업자들을 보며 적잖은 위안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소설의 배경이 된 1954년 무렵,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많은 사람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마당 깊은 집'에서 대구역은 그러한 인생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휴전 직후에도 학교는 열렸고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상을 보냈지만, 그러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길남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았다. 소년 길남에게 대구역은 조악한 삶의 현장을 목도하는 장소이자 동시에 그들의 삶에서 위안을 얻는 장소였다. 엄했던 어머니에게 혼이 난 길남이 가출해서 찾은 곳도 대구역 대합실이었다.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바람막이 벽이라도 제공하고, 웅크리고 잠을 청할 나무 의자라도 있는 기차역 대합실. 옆 사람의 체온을 느끼며, 막막하더라도 살아갈 용기를 조심스럽게 품을 수 있는 곳, 그곳이 길남의 대구역이었다.
이제 대구역은 더 이상 대구의 중심 역사(驛舍)는 아니다. 동대구역에 밀려났지만, 대구역은 여전히 삶에 지친 영혼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다. 번개가 치듯 잠깐 열렸다 파하는 새벽시장 상인, 대구 근교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오가는 대구역에는 삶에 지칠 법한 고단한 그들의 활기가 넘쳐난다. 부지런히 몸을 놀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백년이 넘어 이어온 대구역의 역사가 느껴진다. 조악한 삶 속에서 아주 작은 위안을 건져 올리던 길남의 대구역. 또 누군가는 이곳에서 삶의 위로와 생기를 얻어가길 바란다.
배지연 <대구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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