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고고학으로 본 초기철기시대의 대구

  • 김대욱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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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06   |  발행일 2022-05-06 제21면   |  수정 2022-05-06 18:06
비산·평리동 등 다양한 유적분포…발달된 고대사회 존재 추정
수성구 지산동에 BC 1~3세기 추정 세형동검·철제품 함께 발견
농경 발달하면서 잉여 생산물 많이 소유한 '수장' 출현 방증
각종 청동제품 거의 독점적 사용하며 경제·정치적 세력 성장
청동기는 점차 의기화…지역에 따라 더욱 발전한 곳도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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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고학에서 선사와 고대를 구석기시대 - 신석시시대 - 청동기시대 - 초기철기시대 - 원삼국시대 - 삼국시대 - 통일신라와 발해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 사이에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를 설정하여 기원전 300년, 기원전 100년과 기원전후, 기원후 300년이 중요한 기점으로 논의되어 왔다.

청동기시대는 무문토기와 지석묘, 석관묘 문화가 대표적인데 북쪽으로부터 새로운 철기문화가 전래되면서 이른바 초기철기시대로 진입하게 되는데 이 초기철기시대는 새로이 철기가 등장하면서 청동기가 점차 의기화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즉 초기철기시대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나라의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서북한지역에 철기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할 때부터 기원전 100여 년경까지를 말한다.

그 시기의 하한을 1970년대에는 기원전후까지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그 기원전 100여 년경으로 조정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먼저 대동강유역에 요령지방과는 다른 한국식 세형동검과 철제 무기, 농공구가 출현하면서 시작된다. 이는 대동강유역의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철기문화권 형성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초기철기시대는 '철기시대의 초기'라는 뜻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시대 구분 용어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또 한반도에 철기가 유입되는 것과 이미 정착되어 있던 청동기문화와 잘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초기철기문화에 후기 청동기문화가 포함되어 있어 매우 애매한 개념이다. 이렇듯 '초기철기시대'라는 시기 구분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고 또한 몇 가지 약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고고학의 연구 성과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 글에서도 이 시대 구분에 따랐음을 밝혀 둔다.

초기철기시대에는 이전의 청동기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거나 지역에 따라서는 더욱 발전하기도 한다. 또한 후기 고조선이 위만조선으로 이행하는 단계로서 화북 이남지역과의 전쟁이나 교류, 자체적인 경제·사회 발전을 통해 국가사회로 발전하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그 주변지역에도 부여와 옥저, 삼한 등 여러 정치적 집단이 형성되고 있던 때이다.

대구지역의 초기철기시대 유적으로는 무덤유적과 생활유적을 들 수 있다. 생활유적으로 추정되는 유물산포지는 주로 평지에 입지하고 무덤은 구릉에 분포하는 경향이 있다. 기원전 2세기경에는 지석묘 대신 목관묘가 축조되기 시작하며 흑도장경호와 삼각형점토대토기 등이 부장되어 전통적인 지석묘 사회와는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에 들어서는 동검, 동과, 동모 등 청동 무기류와 주머니호 등의 토기와 철검, 철모, 철부 등 철기류가 함께 위세품으로 부장된다.

그렇다면 이 시기 대구지역은 어떠했을까.

대구지역 초기철기시대의 문화적 특징은 철기의 수용과 다양한 청동기의 매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대구지역도 사회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고 유력한 수장(首長)이 출현했음을 방증한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대구지역의 고고학 유적은 비산동, 서변동, 만촌동, 신천동, 지산동, 평리동유적 등이 있다.

먼저 와룡산 북쪽 말단의 평지에 위치한 비산동유적에서는 1956년에 동모, 동과, 조형검파두식 세형동검, 우각형 동기, 호형대구 등의 청동기가 발견되었으며, 그것이 점판암의 돌무지 속에서 나왔다는 출토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무덤 부장품으로 추정된다.

김대욱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서변동에서는 1964년에 어깨가 있는 주머니형의 청동부가 출토된 바 있고, 1966년 만촌동의 동촌유원지 내에서는 세형동검, 동과, 검파두식 등이 발견되었다. 또 1974년에는 동구 신천동 신천강변의 구릉 사면에서 동과, 동모, 동탁, 청동간두령 등이 발견된 바 있고, 수성구 지산동에서도 세형동검과 더불어 철정으로 추정되는 철제품이 나왔으며, 평리동에서는 세형동검, 동과, 동탁 등 다양한 청동제품이 수습되었다.

이와 같이 대구지역에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대로 편년될 수 있는 상당수의 유적이 분포하였고 다양한 종류의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이는 당시 대구지역에 거주했던 집단의 지배자들이 매우 귀중한 청동제품을 풍부하게 매납할 수 있을 만큼 정치적으로 성장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평리동유적의 경우 청동제의 무기류, 마구류, 경류가 철기류와 함께 출토되고 있어 대구 분지 내에 유력자의 등장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초기철기시대 대구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농경과 어로활동을 통해 생활을 영위하면서 취락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사회 단위집단 내부에서는 각종의 청동제품을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유력자가 성장해 가고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권력의 집중과 사회 분화는 농경이 본격적으로 발달하면서 만들어진 잉여 생산물을 소유하는 경제체제에 의해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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