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뿌리, 문화 예술 중심지 달성 .2] 달성 문화예술의 역사 (하) 사문진에 '귀신통' 내려지며 대구 근대 서양음악사 태동

  • 류혜숙 작가,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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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4-25  |  수정 2023-04-25 07:49  |  발행일 2023-04-25 제16면

[대구의 뿌리, 문화 예술 중심지 달성 .2] 달성 문화예술의 역사 (하) 사문진에 귀신통 내려지며 대구 근대 서양음악사 태동
달성 사문진나루터에는 국내 최초로 피아노가 들어온 것을 기념하는 다양한 조형물들이 설치돼 있다. 당시 주민들은 빈 나무통 안에서 소리가 나자 '귀신이 내는 소리'라며 피아노를 '귀신통'이라 불렀다고 한다.

구한말은 혼란과 격변의 시기였다. 근대화와 함께 다양한 서양 문물이 최초로 들어온 때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획기적으로 변하던 시대였고, 수많은 사람이 문화충격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전통을 지키려는 이들과 개화하자는 사람들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급속하게 침해되자 그러한 혼란과 대립은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한 계몽 운동으로 전개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형태의 민족 운동으로 확대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부로부터 유입된 서양의 문화예술은 민족정신과 시대정신을 전파하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낙동·금호강 물길에 10여 개 나루터
물자수송 외 예술·사상 등 교류의 장
근대미술 선구자 낳고 계몽운동 전파
달성문학 창간 선유문화 지평 넓혀가


[대구의 뿌리, 문화 예술 중심지 달성 .2] 달성 문화예술의 역사 (하) 사문진에 귀신통 내려지며 대구 근대 서양음악사 태동
달성을 대표하는 작가 곽인식의 'Work 81-010'.

◆대구 근대 서양음악의 첫발, 사문진

달성은 고려와 조선시대 물류의 요충지였다. 낙동강과 금호강을 끼고 있어 나루터 수만 10여 개에 달했다. 당시 나루터는 단순히 물류만 수송하는 곳이 아니라 문화와 인적 교류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물자가 수송되는 만큼 수많은 이들이 나루터를 오가며 서로 정보와 문화, 사상 등을 나눴다. 달성의 사문진나루터는 낙동강 상류와 하류에서 모여든 장삿배가 집결하고 수많은 보부상이 드나들던 영남지역 물류의 중심지였다. 이곳을 통해 들어온 물자는 대구를 비롯해 강원과 호남 등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사문진나루터는 신문물의 통로 역할도 했다. 1890년대 영남지역 복음 전파를 위해 부임한 외국 선교사들의 운송 수단은 낙동강 물길을 이용한 짐배였다. 1900년 3월 미국 미시간주에서 배송된 사보담 부부의 이삿짐 속 피아노가 부산 낙동강 하구에서 짐배를 통해 사문진나루터에 도착했다. 한국 최초의 피아노였다. 당시 피아노 소리를 처음 들은 주민들은 빈 나무통 안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매우 신기하게 여겼고 통 안에서 귀신이 내는 소리라 하여 '귀신통'이라 불렀다고 한다. 사문진나루터에 내려진 피아노는 짐꾼 20여 명에 의해 사흘에 걸쳐 대구 종로(현재의 약전골목 부근)의 선교사 저택으로 옮겨졌다. 이는 대구에 근대 서양음악이 전파되는 첫발이었다. 달성군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뮤지컬 '귀신통 납시오'를 제작, 공연하였고 2012년부터 '100대 피아노 콘서트'를 매년 가을 연례행사로 개최하고 있다.

[대구의 뿌리, 문화 예술 중심지 달성 .2] 달성 문화예술의 역사 (하) 사문진에 귀신통 내려지며 대구 근대 서양음악사 태동
달성 출신 목판화가 김우조의 '뒷골목 풍경'.

◆달성의 근현대 미술가들

과거 전통 서화는 개인적 여가 문화에 속해 있었다. 대구지역은 일찍이 전통 서화에 대한 애호가 탄탄했지만 빠르게 들어온 근대 양화와의 공존을 고민했다. 사회 문화의 변혁기에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지역 예술인들은 동시에 사회운동가로서 1920년대 초부터 미술수업과 모임, 연구소 등을 통해 수용한 서양미술을 전문적으로 다져가는 과정을 진행했다. 대구의 미술은 세대를 이어가면서 새로운 교육과 자극을 받았고, 그 저변과 영역이 점점 확장되는 가운데 이인성과 이쾌대 등 대한민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들을 배출하게 된다.

이들과 동년배인 작가 곽인식이 있다. 1919년 달성에서 태어났으며 현풍곽씨 집성촌이 그의 고향이다. 그의 어머니 정악이는 조선 말기 영남의 대가 석초 정안복이라는 걸출한 선비화가의 장손녀로 선조의 이러한 DNA는 곽인식에게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일본 도쿄에서 수학한 그는 유학에서 돌아온 1942년 대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49년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하게 된다. 그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일본특별지부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후배예술가를 이끌었다. 또 민단과 조총련의 합동연립미술전, 연극 황토, 통일음악회 등을 주도하여 활동가의 면모도 드러냈다. 이로 인해 한때 그는 한국으로의 입국을 거부당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지 않았으며 한국 미술계와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1968년 동경국립근대미술관의 '한국현대회화전'에 출품하였고, 196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는 한국인 화가로 참가했다. 197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현대작가전'과 1971년 파리에서 열린 '한국현대회화전' 그리고 1977년 동경센트럴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전'에도 참여했다. 1985년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있었고, 2019년 대구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가 진행되기도 했다.

곽인식은 1961년에 강렬한 모노크롬 작품을 선보였는데 한국에서 처음 시도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1970년대 한국의 '단색화'를 곽인식의 영향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많으며 백남준과 이우환에 비교할 만한 선구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1923년 달성에서 출생한 김우조는 근대기 기라성 같은 화가가 많이 배출됐던 대구지역에서 유일하게 목판화 작업을 한 작가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를 아울러 대구경북은 물론 한국 화단에서조차 목판 작업을 하는 작가는 몇 없었다. 일제강점기 천재화가로 불렸던 달성서씨 서진달에게 그림을 배운 그는 초기에는 유화와 수채화 위주의 작품 활동을 했으나 1950년 이후 목판화를 고집하게 된다. 김우조의 작품은 인물이나 골목 풍경 같은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상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그 가운데 서민들의 삶, 특히 빈곤의 절정에 있는 사람들의 민낯을 그대로 표현한 작품들은 민중미술의 인상을 풍긴다. '신성한 노동력이 주는 쾌감'이 좋았다는 목판화가 김우조. 그에게는 힘든 작업을 극복하게 하는 스승이 있었는데 그것은 조형의 기초를 가르친 스승 서진달과 우리 문화의 정수 중 하나인 '팔만대장경'이었다고 한다.

한국 구상미술의 대표작가로 심상전 미술협회 창립멤버인 서양화가 박무웅도 달성 출신이다. 그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 시골의 풍물과 인물 등 한국적 정서를 담은 토속적인 주제를 향토성 짙게 표현한 작가다. 시적인 정감이 물씬 풍기는 그의 작품은 산업화 시기 급속한 도시화를 거쳐 온 이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는데, 1990년대 초 그는 대구 미술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로 불리기도 했다.

[대구의 뿌리, 문화 예술 중심지 달성 .2] 달성 문화예술의 역사 (하) 사문진에 귀신통 내려지며 대구 근대 서양음악사 태동
사문진나루터는 고려·조선시대 수많은 장삿배와 상인들이 드나들던 영남지역 물류의 중심지였다.

◆현재로 이어지는 달성의 문화예술

구한말 국권 상실기의 달성에는 많은 유가 지식인이 포진해 있었다. 여기서 두드러진 것은 우성규의 '운림구곡', 신성섭의 '와룡산구곡', 채황원의 '거연칠곡' 등 금호강과 가창 비슬산, 최정산 등을 배경으로 하는 구곡문화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들 구곡은 19세기 말 혹은 20세기 중 후반에 창작된 것으로 유학의 전통을 강조하면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와룡산구곡'을 경영한 학암 신성섭은 신숭겸의 후예로, 그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금수의 발길이 나라를 어지럽히지만 강토를 지킬 수가 없어 두문불출한다"며 동지들과 산수에 뜻을 두고 은거했고 만년에는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달성에서는 다양한 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대구광문사는 1906년 대구 달성 지역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계몽 운동 단체로 달성광문사라고도 부른다. 개명 유교 지식층과 거대상인, 지주층, 전직 관료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 단체는 교육 운동, 문화 운동, 경제적 실력 운동 등을 펼쳤다. 특히 교육 운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문회(文會)를 별도로 설치하였는데 이듬해 첫 총회에서 대동광문회로 이름을 바꾸고 그 자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하였다. 대한협회 대구지회는 국채보상운동 이후 대구, 달성 지역의 계몽운동 세력이 설립한 단체로 대구광문사를 역사적으로 계승하면서 교육운동과 실업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일제에 무력으로 항거하는 의병 항쟁에 참여하였으며 국권 피탈 이후에는 국내외에서 다양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시회를 가장하여 결성된 달성 친목회는 1910년대 대표적인 비밀 결사로 꼽힌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그리고 이후의 급속한 도시화를 거치면서 많은 인물을 잃기도 했고 문화예술의 창작과 향유의 장소성이 변하기도 했다. 달성은 낙동강 물길 따라 잉태되고 왕성하게 향유되었던 문화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옛 선유문화는 금호선유문화로 계승되어 시와 음악, 문학과 풍류가 흐르는 축제가 되었다. 2009년에 창간된 '달성문학'은 달성 출신 작가들의 시와 수필, 동화, 소설, 시조 등을 싣고 있으며 달성의 자연과 문화, 인물, 유적 등을 소재로 향토적인 삶을 생생하게 그려 내고 있다. 달성문학은 지역의 실력 있는 문인들을 발굴하는 장으로, 달성 군민의 문학적 갈증을 해소하는 장으로 그리고 타 지역 문학 단체들과의 교류의 장으로 지평을 넓히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달성문화재단

▨참고= 대구의 뿌리 달성, 달성문화재단 달성군지간행위원회, 2014. 경상북도사, 경상북도사편찬위원회, 경상북도, 1983.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국사편찬위원회, 1988.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김일수, 대한제국 말기 대구 지역 계몽운동과 대한협회대구지회, 민족문화논총25,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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