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욱 큐레이터와 함께 '考古 go! go!'] 압독국의 마을, 고대 시지로의 여행 (2) 예나 지금이나…사람 살기 좋았던 '시지'

  • 김대욱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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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02 08:46  |  수정 2023-06-02 08:47  |  발행일 2023-06-02 제21면
욱수·노변동 고분 1천700여 기 발굴…고대 시지인 재력 짐작
토기 생산도 활발…경산·압독국식 토기 주변 지역서 대량 발견
현재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처럼 청동기 때부터 인구 번성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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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가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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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와 주변지역 모습. <출처:영남문화재연구원>

오늘날 시지(時至) 지역은 대구시 수성구 매호동, 시지동, 욱수동, 노변동 등이 해당하는데 과거 이곳은 경북 경산군 고산면에 속하여 고대로부터 경산의 생활권이었으나 1981년 대구로 편입되었다. 이곳 시지 일대의 고인돌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으나 시지 유적이라는 대규모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2년 택지개발로 인해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이다.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거듭되면서 매호동과 사월동 일대에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와 주거지가 확인되었는데 지석묘 하부 구조인 석관묘에는 석검과 석촉, 단도마연토기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매호동에서는 기원후 3~4세기 때 축조된 장방형의 주거시설이 확인되었다.

시지 유적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삼국시대의 마을과 고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시지의 마을 모습을 볼 수 있는 생활유적은 주거지와 건물지, 제의와 관련한 대형 구(도랑), 연못, 수혈 구덩이, 우물 등이다. 매호동의 주거지에서는 지금의 온돌과는 그 형태가 다르지만 난방을 위한 고래시설(방 구들장 밑 고랑으로, 불길과 연기가 나가는 통로)을 발굴한 바 있다. 시지동 공동주택지구간에서는 고상식(高床式) 건물지가 여러 채 출토되었는데 이 건물지는 곡식을 저장하거나 토기를 말리고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물자를 운송하기 위한 도로가 발굴되었는데 이 도로는 잔자갈을 깔아 사람이나 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시지 유적의 마을 경관 중에 생산시설, 특히 토기 공방에 대한 연구도 주목된다. 대구 욱수동과 경산 옥산동 일대에는 토기를 생산하던 가마시설이 대량 확인되었는데 현재 시지노인전문병원이 위치한 구릉 일대이다. 이 가마에서는 4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경질토기가 가장 먼저 구워졌는데 임당유적을 비롯한 이 지역의 자체 수요를 위해 가마가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5세기 전반에는 유적의 중앙부에 2~3개의 가마를 나란하게 축조하여 사용하였는데 이는 토기의 대량 생산을 위해 가마를 효율적으로 사용·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5세기 중·후반에는 가마가 급증하는데 이 시기는 시지 일대에 고분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많은 양의 토기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구 욱수동·경산 옥산동 토기 가마 유적은 이 일대 즉 대구 노변동, 욱수동, 시지동, 가천동, 경산 중산동 등에 분포한 고분에 부장되는 토기를 공급하던 곳으로 볼 수 있다. 6세기 전반이 되면 가마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며 토기 생산 공방의 기능을 점차 상실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고배와 장경호와 같은 기종에서는 이곳만의 독특한 지역성을 강하게 띤 디자인으로 변모하게 된다.

고배의 경우 기존의 신라토기의 변화 경향과는 달리 잔의 두께가 아주 얇아지면서 그 깊이가 깊어진다. 내부에는 소위 물레빚기를 통한 나선형의 회전성형흔이 뚜렷하게 관찰되며 다리의 끝단이 곡선으로 크게 휜다. 대부장경호도 이 시기가 되면 아주 특징적인 모습을 띤다. 즉 목 부분이 경사지게 길게 뻗어 올라가는데 이 부분을 4~5단으로 구획하고 구획선 사이에는 밀집된 파상문(波狀紋: 물결모양무늬)을 새긴다. 이러한 고배와 장경호는 아주 정형성을 갖추고 있어 '경산식' 또는 '압독국식' 토기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시지 유적의 고분은 욱수동과 노변동 일대의 구릉에 축조되어 있는데 일명 시지지구 고분군이라고 부른다. 30여 년 동안 1천700여 기가 발굴되어 단일 유적에서 발굴된 고분의 숫자로는 아주 압도적이다. 고분의 형태는 덧널무덤(木槨墓), 돌덧널무덤(石槨墓), 돌방무덤(石室墓) 순으로 변천하며 그 축조 과정이나 유물 부장의 양상이 아주 잘 드러난다.

덧널무덤은 직사각형으로 구덩이를 파고 그 내부에 나무 덧널을 안치한 후 주검을 매장하는 방식이며 대체로 4세기 중후반부터 5세기 중반까지 축조된다. 돌덧널무덤은 5세기 초부터 6세기 중반까지 가장 많이 축조된 형태로 네 면을 돌을 쌓아 만드는 방식이다. 강돌로만 네 면을 다 쌓기도 하고 널찍한 돌판을 아래에 세우고 그 위를 강돌로 쌓기도 한다. 이 돌덧널무덤은 2~3기가 나란하게 축조된 사례가 있는데 이런 경우 부부의 무덤 또는 가족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6세기 중반이 되면 돌방무덤이 축조되는데 이 무덤은 무덤 내부로 출입하는 문과 널길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돌방무덤은 가족묘처럼 여러 차례 주검을 안치하는 방식인데 7세기 중후반까지 사용되다가 더 이상 고분은 축조되지 않는다. 이러한 무덤 축조 양상을 통해 볼 때 삼국시대 특히 5~6세기의 시지는 아주 번성하였고 많은 사람이 고분을 축조할 수 있는 재력이나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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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욱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이러한 고고학 조사 성과를 통해 볼 때 시지 지역에는 적어도 청동기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했음이 확인되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한 대규모의 마을은 삼국시대에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이곳에 빼곡하게 들어선 아파트의 경관과 비교해 볼 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살기 좋은 마을이었던 것 같다. 특히 '경산식' 또는 '압독국식' 토기는 표준화된 생산 체계에 따라 대량으로 생산되어 각 지역으로 소비되었던 것이다. 이곳 생산품은 가까운 시지지구 고분군뿐만 아니라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고분군, 금호강 주변의 경산 신상리고분군과 대구 가천동고분군, 대구 불로동고분군과 괴전동고분군, 대구 시내의 복현동고분군이나 대명동고분군, 나아가 대구 달성의 화원 성산동고분군이나 다사 문양리고분군, 성주 명포리고분군 등에서도 확인된다.

이렇듯 시지 유적은 삼국시대의 생활유적, 생산유적, 도로, 분묘, 토성과 산성 등 삼국시대의 모든 유적이 포함된 취락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이곳에 접한 경산 중산지구 유적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삼국시대의 토기 가마, 고려·조선시대의 기와 가마가 확인되었으며 노변동에는 사직단도 축조되었다. 따라서 이 일대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당시 사람들의 생산 활동과 마을 풍경, 고분을 통한 장제 공간까지 어우러진 복합 유적으로 당시의 생활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곳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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