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대봉동의 초고층 아파트인 센트로팰리스 단지에는 근대 건축물 하나가 고즈넉이 들어앉아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 실업인 양성을 위해 일본인이 만든 '옛 대구공립상업학교 본관' 건물이다. 대구시 유형문화재 48호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로 역사성이 깊다. 특히 근대 상업교육의 요람이자 최초의 실업교육시설로 소중한 건축유산이다.
대구 중구에 있는 옛 대구상업학교 본관. 2022년까지 대구문화재단 건물로 사용됐다. 중관과 강당은 2000년대 중반 철거되고 지금은 붉은 벽돌의 2층짜리 건물인 옛 본관만 남아있다. <영남일보 DB>
◆상업교육 필요성 대두되면서 1923년 설립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개정된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한다. 표면상 일본학제와 동일하게 함으로써 융화시키려는 정책이었다. 당시 대구는 도시의 팽창과 인구 집중으로 상공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에 상업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1923년 2월16일 대구공립상업학교가 5년제 10학급으로 설립인가를 받고 4월16일 문을 열었다.
개교 당시에는 일본인 학교인 대구중학교 교사 일부를 빌려서 잠시 '더부살이'를 했지만, 그해 현재 위치에 본관 건물이 완공되면서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됐다. 개교 첫해 100명(한국인 50명·일본인 50명)이 입학해, 1928년 3월 52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후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 지역의 대표적인 상업교육의 요람으로 자리잡았다.
1934년에는 중관과 강당을 준공했는데, 2000년대 중반경에 철거됐고 현재는 본관만 남아 있다.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 높디높은 은빛 아파트로 둘러싸인 풍경은 조금 생경하다. 오롯이 대구상업학교 본관만 바라보면 대칭성과 정면성이 직관적으로 도드라진다. 그 속에 수직의 창이나 굴뚝, 화강석의 수평 돌림띠 등이 수직성과 수평성을 드러내고 장식적인 요소들이 소소하게 다가온다.
1930년 대구공립상업학교의 모습. <상원고 제공>
◆개교 당시 모습 잘 유지하고 있는 근대건축 유산
대구상업학교 본관은 붉은 벽돌로 조적한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건물로 연면적은 1천305.08㎡이다.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건물에 반원형의 지붕창(도머, domer)이 있는 박공지붕을 올렸는데 중앙 입구와 양쪽 끝을 탑처럼 구성하고 중앙에는 모임지붕, 양끝에는 삼각의 페디먼트가 정면을 향하도록 박공지붕을 올렸다.
입구 전면에는 원기둥과 사각기둥으로 지지하는 포치가 별도로 설치돼 있다. 포치의 지붕은 수평 슬래브에 난간을 둘렀는데 기하학적인 다양한 장식으로 정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난간 장식은 모임지붕과 페디먼트 아래에도 보다 단순화된 형태로 적용돼 있다.
평면은 중앙 입구 홀의 계단실을 중심으로 좌우 편복도식의 교실로 구성돼 있다. 계단실 배면에 건물 뒤쪽으로도 출입이 가능한 부출입구를 뒀는데, 계단을 4개의 원기둥으로 받치고 계단 하부를 틔워서 현관을 전면과 후면으로 개방함으로써 최대한의 공간을 확보하도록 했다. 내부 칸막이벽, 창호, 마감재 등이 일부 변형됐지만 건물 전체의 형태 및 구조는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10대 학생들의 항일…태극단의 역사가 깃든 곳
대구상업학교 본관 건물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이 학교 학생들은 비밀결사체 '태극단(太極團, 일명 T·K·D)'을 조직해 일제에 항거했다. 태극단은 학생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그 중심에 이 학교 학생 이상호<사진>가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날로 치열해가던 1943년 4월의 어느 밤이었다. 산산이 흩어지는 빗방울 사이로 거친 바람이 물색없이 떠다녔다. 봄밤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으나 관심을 두는 이, 아무도 없었다. 긴박한 것은 계절이 아니라 식민지 백성의 삶이었다.
"우리가 비록 10대의 학생이지만 태극(太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다. 모든 존재와 가치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인 실체가 바로 태극이라는 것을 말이야.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 '존재와 가치의 근원이 되는 궁극'의 길은 무엇일까. 바로 독립이다. 그러려면 우리 청년들이 일어서야 한다. 설령 그 끝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는 일 없이 투쟁해야 한다."
태극단의 본격적인 서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말을 마친 대구공립상업학교 학생 이상호의 심장이 벌떡거렸다. 그는 어려서부터 보고 겪은 것이 모두 일제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그러니 이상호의 가슴 속에는 일제의 차별과 그네들의 우월감에서 오는 멸시가 피멍으로 맺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날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던 서상교와 김상길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상호의 이런 생각은 한 해전인 1942년 6월 한차례 행동으로 옮기려 했지만 무산된 적이 있었다. 당시 이상호는 같은 학교 김종우·이태원을 비롯해 대구직업학교(대구공고) 윤삼룡, 경북중(경북고) 최두환 등 7명과 심신단련과 연구를 위한 모임을 만들려고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좌절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 도모해야 했고 이제는 달라져야 했다. 마침내 1943년 4월, 이상호는 서상교, 김상길과 만나 일제의 민족차별과 독립의 당위성을 논의하고 민족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체 태극단을 조직한다.
"세를 끌어올려야 해. 덩치를 키워야 힘도 붙는 거야." "각오에 각오를 모아보자고. 전심전력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거든."
대구상업학교의 재학생이었던 세 사람은 목표를 조직의 확대에 두고, 우선 학교 단위의 동지 규합에 들어갔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즉부터 항일의 뜻이 높았던 김정진, 김종우, 이원현, 윤삼룡, 이태원, 최두환 등이 바로 합류해 들어왔다. 그들의 갈급함 또한 누구 못지않았다.
부피가 커져가는 만큼 비밀결사체 태극단의 정체성 또한 날로 확고해져갔다. 태극단은 먼저 최고의결기관으로 간부회의를 구성해 이상호가 단장, 서상교가 체육국장, 김상길이 관방국장을 맡았다. 무엇보다 '조선민족의 이상적인 단결과 능률로 세계 인류의 영원한 평화, 자유, 평등 등을 찾는 데 있다'를 강령으로 세웠다. 또 정단원, 준단원, 건아대(建兒隊)원으로 조직을 구분하고 특히 건아대에는 중학교 1․2학년생과 초등학교 상급반 학생을 가입시켰다.
현실적인 투쟁을 위해선 육체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판단, '등산부'와 '씨름부'를 두어 체력을 단련했다. 특히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군사부'를 두기도 했고, 일제의 패전과 조선독립의 가능성을 알리는 전단을 살포하기 위해 '항공부'를 조직했다. 여의치 않을 경우 중국으로 망명하거나 폭동도 불사하겠다는 최후의 전략도 세웠다.
틀을 갖춘 태극단은 시시때때로 모여, 1919년의 세계약소민족해방운동과 인도 간디의 무저항 반제국주의운동 그리고 중국 쑨원의 삼민주의(三民主義)와 관련해 열띤 토론을 이어가며 정신을 단단하게 무장했다.
그리고 1943년 5월9일, 태극단은 앞산에서 공식적인 결성식을 갖기로 계획한다. 하지만 참석률이 저조해 결성식은 무산되고 말았다. 해, 작은 탄식이 몇 가닥 이어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작은 보폭 하나도 주의해야 했으니 만나기로 작정했다고 해서 반드시 만나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이상호를 비롯한 태극단원들은 다시 힘을 모았다. 6월6일에 다시 결성식을 갖기로 하고 숨을 골랐다. 날씨가 조금씩 더워지는 동안 구국의 열기도 끓어오르고 있었다.
결성식을 보름여 남겨둔 5월23일. 봄의 끝물이었다. 천하를 덮은 풀들도 아직은 그 색이 옅었다. 하지만 햇살은 곧 다가올 여름 앞에서 전력질주를 앞둔 달리기선수마냥 숨을 깊게 고르고 있었다.
'수많은 벗들이 뜻을 함께하며 동지가 됐고, 수많은 상상들이 구체적인 계획이 됐다. 이젠 달아져야 한다. 결성식을 치르고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결성식을 준비하며 이상호는 다시 한번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떠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독립을 향한 뜻을 굽히지 않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였다. 문짝이 큰 소리를 내며 떨어져나가더니 일경들이 들이닥쳤다. 날선 눈빛에는 살기가 묻어있었고,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무섭게 달려들었다. 조직원 누군가의 밀고였다.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나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태극단 단장 이상호는 결성식을 불과 보름여 앞두고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태극단의 일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고 나 혼자만의 기획이었소."
살벌하고 으스스한 취조실에서 이상호는 이를 악물었다. 다른 대원들만큼은 무사해야 했다. 살아나가야 또 도모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해서 그 누구의 이름도 발설하지 않고 버티고 버텼다. 하지만 일경도 호락하지 않았다. 일경은 곧장 이상호의 집을 압수수색했고, 그의 집 천장에 숨겨둔 태극단 대원 명단을 찾아내 손에 넣었다.
이로써 대원 전체에게 고난이 시작됐다. 곧바로 김상길, 서상교, 김정진, 이준원, 이원현, 윤삼룡, 정광해, 이태원, 정완진 등 9명이 체포됐고, 뒤이어 정단원 및 준단원들이 차례로 끌려왔다. 결국 이상호를 비롯한 단원 26명 모두가 체포되고 말았다. 계절이 바뀌어가는 내내 취조와 고문이 이어졌다. 장정들도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으나 후회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던 1944년 1월19일, 마침내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최후판결이 떨어졌다. 이상호를 비롯한 6명에게 2년 내지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김천과 인천의 소년형무소에 나누어 수감하라는 판결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준원, 이원현, 이상호가 그만 흉막염에 걸려버린 것이다. 험하고 모진 상황에 몸이 어긋난 것이었으나 제대로 된 치료가 있을 리 없어서 결국 이준원이 목숨을 놓고야 말았다. 그리고 병보석으로 풀려난 이원현과 이상호도 더는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순국했다.
결국 태극단은 제대로 결성식도 하지 못한 채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요절이었다. 하지만 그 정신은 오롯이 남았고, 일제 역시 깊게 내린 정신을 뿌리 채 흔들 수 없었다. 이에 일제는 민중봉기를 우려해 태극단 사건을 극비에 부쳤다. 광복 이후에도 6·25전쟁 등 여러 국내외 사정으로 사건의 실상은 역사 속에 묻히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 1963년에 비로소 태극단의 행적이 알려졌고, 지금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정신과 맥을 같이하는 대구의 대표적인 학생독립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1943년 대구공립상헙학교의 모습. 해방 후 대구상업고등학교로 유지돼다 1985년 달서구로 이전했다. 2004년엔 상원고로 교명을 바꾸고 일반계 고등학교로 전환했다. <상원고 제공>
◆살아 있는 역사이자 귀중한 유산
대구상업학교는 해방 후 대구상업고등학교로 유지됐고 1985년에 대구 달서구 상인동으로 이전했다. 2004년 상원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일반계 고등학교로 전환했다. 현재 상원고등학교 후문 인근에는 총동창회에서 2003년에 세운 '태극단 학생 독립운동 기념탑'이 서 있다. 대구지방보훈청은 매년 태극단이 결성된 5월9일에 기념탑 앞에서 대구상원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태극단 학생 독립운동 추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학교가 이전한 뒤 남아있던 본관 건물은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이 인수해 한동안 공단 사무실과 후생관 등으로 사용됐다. 이후 학교부지는 결국 주택지 개발의 대상이 돼 강당과 중관 등이 사라졌지만 본관은 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해야 한다는 많은 목소리들로 인해 보존될 수 있었다. 43층의 초고층 아파트 속에 남아있던 대구상업학교 본관 건물은 2009년부터 13년간 대구문화재단에서 사용했으나 현재는 시설 노후화로 비워져 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녀온 옛 대구공립상업학교 본관은 살아 있는 역사이며 귀중한 유산이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박준상기자 junsa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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