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근대 건축, 중구를 거닐다] <1> 계성학교 아담스관·맥퍼슨관·핸더슨관

  • 박준상·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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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2-16 13:08  |  발행일 2026-02-16
영남 최초의 서양식 학교 건물…대구 만세운동의 역사도 오롯이
계성학교 아담스관과 3·1운동 기념탑. 계성학교의 설립자인 아담스의 이름을 따, 1908년 지어졌다. 근대식 건축물로서 역사적 의미와 시대성을 반영하는 귀중한 건물로 대구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계성학교 아담스관과 3·1운동 기념탑. 계성학교의 설립자인 아담스의 이름을 따, 1908년 지어졌다. 근대식 건축물로서 역사적 의미와 시대성을 반영하는 귀중한 건물로 대구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선교사가 짓고 독립운동 품은 곳…고요과 고귀함 동시에

1900년대 초 서양식 건축양식, 대구 유형문화재로 지정

대신동 서문시장의 난전들 저 너머로 계성중학교가 고요하게 자리한다. 길을 따라 교정 깊숙이 들어가 50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 학교 본관인 핸더슨관을 마주하게 된다. 오른쪽 아래로는 맥퍼슨관이 자리하고 왼편 앞에는 아담스관이 위치한다. 모두 붉은 벽돌이 도드라지는 서양식 건물들이다. 1900년대 초에 지어진 이들은 근대식 건축물로서의 역사적 의미와 시대성을 반영하는 귀중한 건물로 대구시 유형문화재로 각각 지정돼 있다. 근대 초기, 우리 역사의 한 면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있었다. 19세기 말 대구로 들어온 그들은 병원과 사택, 교회, 학교 등을 짓고 선교활동과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였는데 영남지방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이 바로 계성학교였다.


◆아담스관


대구 최초의 선교사는 제임스 E. 아담스(James Edward Adams)로 알려져 있다. 한국 이름은 안의와(安義窩)이며 대구선교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1895년 한국에 들어와 1897년 대구경북 지역 최초의 교회인 남문안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1906년 10월 남문안교회 내 선교사 사택으로 쓰던 초가집을 학교 건물로 삼아 중등과정의 계성학교를 열었다. 교장은 아담스 선교사, 교사는 이만집(李萬集), 학생은 27명이었다. 이후 1908년에 미국 선교부와 아담스 가문으로부터 2만4천원의 자금을 지원받아 학교 건물을 지었는데 바로 아담스관이다. 영남 최초의 서양식 학교 건물이자 영남지방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식 교육기관이었다. 아담스 선교사는 자신의 어머니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건물을 '아담스홀'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건물의 연면적은 407.85㎡로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다. 기초와 지하실은 1907년에 철거된 대구읍성의 성돌을 썼으며 나머지 벽체는 붉은 벽돌로 조적했다. 지붕은 박공 구조에 한식기와를 얹은 절충식 형태로 서양풍에 한국의 멋이 더해졌다. 평면은 장방형이며 동쪽 정면에 종탑, 서쪽에 출입구를 마련했다. 현관홀과 연결되는 중복도 양쪽으로 총 4개의 교실이 있었고 2층은 통칸으로 만들어 예배공간으로 사용했으며 지하층은 보일러실과 창고로 썼다.


외관은 정면 중앙에 돌출된 종탑을 설치해 대칭성과 정면성을 강조했다. 종탑의 하단부에는 화강석 버팀기둥을 세우고 지붕 아래에는 반원 아치의 아케이드를 뒀다. 종탑 중앙의 창문은 3심원 아치 모양이고, 교실부의 창문은 결원 아치로 구성해 목재 오르내리창을 달았다. 이 건물에 사용된 창호재료와 유리, 난방설비부품 등은 모두 미국에서 가져왔다. 아담스가 직접 설계와 감독을 맡았으며 공사는 신부들과 함께 건너온 중국인 벽돌공과 개항기에 일본에서 부산으로 건너온 일본인 목수들이 했다고 전해진다.


계성학교는 1912년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사립학교 인가를 받았다. 1935년에 남쪽 교실에 돗자리 40매를 깔고 유도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계성유도의 효시다. 1950년대에는 도서관으로 사용됐다. 1964년에는 정면계단을 건물 후면으로 옮기고 1998년에는 한식기와를 동 기와로 교체했다. 아담스관 2층 정면에는 '인외상제지지본(寅畏上帝智之本)'이라는 문장이 부착돼 있다. 이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계성학교가 100년 넘게 지켜온 교훈이다.


아담스관은 1919년 대구 만세운동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그해 3월3일,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갑성은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문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전 계성학교 교사)에게 전달했다. 이만집 목사는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 계성학교 백남채, 김영서 교사 등과 함께 아담스관 지하실에서 등사기계를 이용해 선언문 200부가량을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그리고 서문시장 장날이었던 3월 8일 3시, 이만집, 김태련, 김영서, 백남채, 계성학교 졸업생인 손인식, 김정오, 대구지역 교인들,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경학교, 대구고보 학생들 등이 서문시장에 집결했다.


시장의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 만세삼창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학생과 시민 등 1천여 명이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옆)으로 향했다. 계성학교의 교사들과 전교생 46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대구 만세운동으로 형벌을 받은 사람은 모두 76명이었는데, 그중 44명이 계성학교 전 현직 교사와 재학생들이었다. 대구 만세운동은 결국 일제에 의해 진압됐지만 계성학교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이후로도 이어졌다.


계성학교 맥퍼슨관의 모습.  맥퍼슨관은 사립학교 인가 후 학교공간 확장을 위해 1913년 새로 건립됐다. 설립자인 아담스 선교사의 부친인 맥퍼슨이 기증한 자금으로 마련됐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계성학교 맥퍼슨관의 모습. 맥퍼슨관은 사립학교 인가 후 학교공간 확장을 위해 1913년 새로 건립됐다. 설립자인 아담스 선교사의 부친인 맥퍼슨이 기증한 자금으로 마련됐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맥퍼슨관


계성학교의 사립학교 인가 후 학생 수는 점차 늘어났다. 교사가 협소해지기 시작하자 공간 확장에 대한 염원이 커졌다. 당시 안식년을 맞아 잠시 고국으로 돌아갔던 아담스 선교사는 새로운 교사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는데, 그의 열정에 감동한 아버지 맥퍼슨(Mcpherson)이 4만원의 거금을 기증했다. 그 자금으로 1913년에 건립된 새로운 건물이 계성학교 맥퍼슨관이다. 건물의 설계와 감독은 아담스와 제2대 교장인 선교사 라이너(R. D. Reiner)가 맡았고, 중국인 벽돌공과 일본인 목수들이 시공했다.


맥퍼슨관은 아담스관 북쪽에서 동향으로 배치돼 있다. 연면적은 455.4㎡,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의 붉은 벽돌 건물로 모임지붕에 한식기와를 올린 모습이다. 이곳의 기초와 지하실에도 대구 읍성의 성돌이 쓰였다.


평면형은 정방형에 가까우며 정면 중앙의 주 출입구에 설치된 사각탑(파빌리온, Pavilion)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룬다. 사각탑에 설치된 출입문은 결원 아치형에 목재 여닫이문이다. 벽면에는 반원의 아치창을 설치하고 밑인방에 3단 내쌓기로 물흘림 경사를 두었으며 층간은 수평 돌림띠(코니스, Cornice)로 장식했다. 건물 유리와 각종 설비는 미국에서 가져왔다. 내부 바닥은 목재 마루였으나 1965년에 건물 내부를 철근콘크리트 기둥으로 보강하고 모두 슬래브로 교체했다. 건축 당시에는 과학실과 음악실 등으로 사용됐다. 이곳에서 한국 현대음악의 선구자인 박태준과 현제명이 함께 공부했다.


계성학교 아담스관과 맥퍼슨관 사이에 학교 본관으로 사용되던 핸더슨관. 5대 교장이자 직접 설계와 공사 감독을 한 핸더슨의 이름을 따 1931년 건립됐다. <영남일보 DB>

계성학교 아담스관과 맥퍼슨관 사이에 학교 본관으로 사용되던 핸더슨관. 5대 교장이자 직접 설계와 공사 감독을 한 핸더슨의 이름을 따 1931년 건립됐다. <영남일보 DB>

◆핸더슨관


아담스관과 맥퍼슨관 사이에 학교 본관 건물인 핸더슨관이 자리한다. 계성학교의 제5대 교장인 핸더슨(Henderson, H.H.)의 이름을 딴 건물로 1931년에 건립됐다. 건축을 위한 자금을 모금한 이는 선교사 블레어(H. E. Blair)다. 동산의 블레어 주택과 약령시의 교남YMCA를 지은 바로 그 분이다. 핸더슨관은 교장이 직접 설계와 감독을 하고 기초공사는 학생들이, 상부공사는 중국인 벽돌공과 일본인 목수들이 했다고 전해진다.


핸더슨관은 연면적 2639㎡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붉은 벽돌의 조적식 구조였으나 1964년에 3층으로 증축하면서 건물 내부에 철근콘크리트 기둥을 세우고 바닥을 슬래브 구조로 변경했다. 평면은 장방형의 중복도식으로 정면 중앙의 현관을 중심으로 각 실을 균등하게 배치해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건물 정면 중앙부에는 2개 탑이 있다. 옥상의 흉벽(패러핏, Parapet)과 탑의 상부에는 여장을 두어 서양 중세의 성곽을 떠올리게 한다. 벽면에는 수직 창을 설치해 2개의 수직 탑과 함께 고딕적인 수직선을 강조하고 있다. 층간에는 수평 돌림띠를 둘러 르네상스적인 장식성과 수평선을 강조했다.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지면서 계성학교는 1943년 예배와 성경 과목이 폐지당했고, 1944년에는 학교 목사 신후식(申厚植)과 학생 등이 구속됐다. 1945년 2월에는 일제의 강압으로 학교명이 대구공산중학교로 바뀌었다. 1949년 6월 계성중학교로 변경 인가를 받았고, 1950년 4월 계성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계성고는 2016년 3월 대구 서구 상리동으로 이전했다. 대구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박준상기자 junsa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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