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대봉동 달구벌대로변에는 옛 대구사범학교 본관과 강당이 나란히 자리한다. 대구사범학교는 1922년 3월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사범학교 규정에 의거, 1923년 경상북도 공립사범학교로 개교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교육 정책 실행에 필요한 교원양성이 목적이었다. 1929년에는 관립 대구사범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개교와 함께 본관이 건립됐고 강당은 1925년에 들어섰다. 일제 강점기 대구사범학교는 경성사범학교, 평양사범학교와 함께 조선 3대 사범학교로 꼽혔다. 학비와 기숙사비는 물론 용돈까지 지급됐고 모집인원이 100여명 정도였기 때문에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들었다.
옛 대구사범학교 본관. 1층에는 역사관이 있다. <영남일보 DB>
◆본관·강당 모두 등록문화재
본관은 동서로 긴 직사각의 붉은 벽돌 조적조 2층 건물로, 가운데 돌출된 입구를 강조한 일제강점기 학교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전면은 중앙 포치를 중심으로 서쪽이 한 칸 더 길다. 1972년에 본관 건물의 서쪽 교실이 화재로 전소되고 외벽만 남았던 일이 있다. 이후 이 학교 출신인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지시로 원형에 가깝게 복구됐는데, 그때 한 칸이 더 증축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붕은 반원형의 지붕창을 가진 우진각지붕이었으나, 증축으로 인해 서쪽은 박공지붕이다. 증축된 부분을 빼고 보면 건립 당시 건물의 정면은 중앙 포치를 중심으로 대칭이다. 중앙부와 양쪽 끝 계단실의 입면을 화강석으로 마감하고 지붕에 환기창을 가진 다각형의 변형된 페디먼트로 장식해 정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강당은 본관의 우측에 위치하는데, 역시 동서로 긴 직사각의 붉은 벽돌 조적조 건물이며 지붕창이 있는 박공지붕이다. 원래 입구는 타일 그림이 있는 동쪽에 나 있었으나 현재는 서쪽에 출입구가 있다. 현재 대구사범학교 본관과 강당 두 건물 모두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개교 때부터 항일학생운동 활발하게 전개
식민지 지배체제 교육 도구로서의 인재양성이라는 설립배경과 정반대로 대구사범학교에서는 개교 때부터 학생들의 항일운동과 민족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1930년대 중반 일시적으로 침체되기도 했지만,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까지 대구지역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했다.
학생들은 특히 역사와 조선어를 가르쳤던 김영기 교사와 사회주의 사상을 지녔던 현준혁 교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930년 3월에 항일비밀결사 '주먹대'가 발각돼 6명이 검거되고 4명이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1932년 1월에는 현준혁 교사를 중심으로 한 사회과학연구그룹의 학생 37명이 검거, 10명이 기소되기도 했다.
1934년에는 독서회 활동이 발각돼 20여 명이 처벌됐다. 1938년 조선어 과목이 폐지되자 대구사범 학생들은 '민요집'을 발간해 우리말 보존에 나서기도 했다.
1939년 경부선 복선공사에 전교생이 강제로 동원돼 왜관에서 철도작업을 하게 됐는데, 이때 박영섭 등이 평소 악질적이었던 일본인 교사를 폭행한 일이 있다. 일명 '왜관사건'으로 이 일로 7명이 퇴학당하고 11명은 무기정학을 당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학생 20여명이 왜관 철도 공사 현장에서 비밀결사 '백의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후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더욱 조직적이고 비밀스럽게 진행됐다. 1940년 '문예부'가 조직됐고 1941년에는 '연구회' 및 '다혁당'을 조직해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다 1941년 8월, 문예부의 기관지인 '반딧불'이 일본 경찰에 입수되면서 이들의 활동이 발각되고 말았다. 관련자 300여 명이 체포됐고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35명이 구속됐다. 가혹한 고문과 조사 끝에 26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에서 7년까지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이들 중 5명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감옥에서 순국했다.
대구사범학교의 항일운동은 단순한 학생 소요가 아니었다. 국가보훈부 공훈록과 독립운동 판결문을 분석해보면, 1941년 '다혁당' 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르거나 퇴학당한 대구사범 관련자는 확인된 인원만 300여 명에 달한다. 특히 졸업 후 교사로 부임해서도 제자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검거된 사례가 다수 존재한다는 점은, 이곳이 단순한 '교원 양성소'가 아니라 '항일 교사의 산실'이었음을 통계적으로 증명한다.
옛 대구사범학교 강당. 등록문화재 제5호로 지정돼 있다. <영남일보 DB>
◆박정희 대통령이 다닌 학교로도 유명
대구사범학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다닌 학교로도 유명하다.
구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15세 소년 박정희는 1932년 그해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정원이 100명이었는데 총 응시자는 1천70명이었다. 학비를 댈 엄두를 못 할 만큼 가난한 집안이어서 가족들은 내심 진학을 포기했으면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담임과 교장 선생의 설득 끝에 결국 시험을 보게 됐고 합격했다. 입학성적은 51등이었다. 구미보통학교에서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그가 처음이어서 학교는 물론 구미지역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장래 훌륭한 인물이 되겠다는 그의 꿈은 입학식과 함께 좌절되고 말았다. '모두가 천황 폐하의 충실한 백성이 돼야 한다'는 교장의 훈시가 그를 실망시켰다. 이후 일본인 상급생에게 경례도 하지 않았고, 사진첩에도 단기(檀紀)를 사용하는 등 말썽을 피우기도 했다고 한다.
대구사범은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 학교답게 민족의식이 강했다. 대구지역의 항일학생운동을 이끌며 일제에 저항했다. 이런 분위기는 박정희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결석이 잦고, 학습 의욕이 떨어졌다. 그것은 가난과 일제의 억압에 시달리던 시기에 그가 할 수 있는 몸부림이었다.
그는 정규과목 공부보다 고전, 역사, 소설, 전기 등 다양한 교양서적들에 심취했다. 훗날 생각이 깊고, 감정이 섬세한 이유가 바로 이 시절 많은 양의 독서에서 길러졌다고 한다. 동기생으로 문화방송 사장을 지낸 조증출은 박정희 대통령의 학교생활에 대해 '특히 국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기숙사생활은 대체로 유쾌하고 유익했다. 박정희의 인품은 기숙사생활을 통해 배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체생활을 5년간 해왔기 때문에 공덕심과 희생적 봉사정신을 도야(陶冶)하게 됐고, 소아를 대의적 입장에서 버릴 수 있는 정신적 소지를 함양했다'라고 증언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휘호를 새긴 바위와 기념비. 2004년 역사관을 개관하면서 함께 세워졌다. <영남일보 DB>
졸업할 때 성적은 좋지 못했다. 식민지 교육정책에 대한 불만과 가난한 집안형편이 겹치면서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종종 학교의 구석진 곳에 가서 즐겨 부르던 나팔을 부르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그곳에는 수양버드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나뭇가지에 몸을 숨기고 가져간 나팔을 힘껏 불며 잠시나마 서러움을 하늘 높이 날려 보냈다.
지금도 옛 대구사범학교 본관과 강당 건물이 있는 경북대 사범대 부설중·고 교정에는 그가 나팔을 불었던 수양버들이 남아있다.
◆항일운동과 박 대통령 기록 전시된 역사관으로
해방 후인 1946년 10월15일, 대구사범학교 본과는 대학기관인 국공립 대구사범대학으로 승격됐다. 이어 1962년에는 경북대학교로 흡수 통합돼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의 모태가 됐고, 대구사범학교는 1963년 초 공식적으로 폐교됐다. 등록문화재인 옛 대구사범대학 본관과 강당은 현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중학교의 교정에 위치해 있으며, 본관은 2004년부터 역사관으로 쓰이고 있다. 역사관에는 대구사범학교의 역사와 항일운동의 기록 그리고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 등이 전시돼 있다.
본관 앞에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 순절동지추모비'와 '박정희 대통령 기념비'가 나란히 자리한다. 기념비는 역사관을 개관하면서 2004년에 세운 것으로 그의 유명한 친필 휘호인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해'를 바위에 새겨 뒀다. 추모비는 1973년에 세워진 것으로 화재로 전소된 본관 건물을 복구한 뒤 세운 것이다. 비문에는 '다혁당', '문예부', '연구회', '반딧불'고 같은 이름들과 그 뜨거웠던 많은 이들에 대한 기억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감옥에서 순국한 강두안, 박제민, 박찬웅, 서진구, 장세파 등의 이름도 또렷이 새겨져 있다. 비문의 첫 문장은 이렇다. '겨레의 역사 오램이 자랑이 아니라, 그 역사 속에 참되이 살았음이 자랑이요, 그들의 거룩한 행적이 겨레의 어려운 고비를 올바르게 이끎으로 해서 귀한 것이다.'
박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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