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력있는 호국의 도시 상주 .5 끝] 전쟁흐름 바꾼 화령장 전투

  • 류혜숙 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 |
  • 입력 2023-06-07 07:43  |  수정 2023-06-07 07:44  |  발행일 2023-06-07 제12면
6·25전쟁 국군 단독 첫승…마을주민 첩보로 시작된 대승

2023060601000176500006861
상주 화서면 하송리에 위치한 화령장전투전승기념관 전경. 화령장전투전승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국군 17연대 1대대가 북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화령초등학교 송계분교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상주의 화서나들목을 빠져나오자 전차의 긴 포신과 마주한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이내 서글프게도 익숙해진다. 고요한 전차 곁을 지나 계단을 오른다. 청량한 숲길의 끝에 너른 광장이 펼쳐진다. 거기에는 '화령장지구전적비'가 서 있다. 전적비 가운데에 박혀 있는 황동의 부조 속에서 철모를 쓰고 총을 겨눈 군인들을 본다. 머리에 보따리를 인 여인과 어깨에 짐을 진 허리 굽은 사내도 보인다. 전적비는 1950년 6월 시작된 6·25전쟁 당시 화령장 지역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을 격퇴한 7월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화령장 전투는 우리 국군이 단독으로 이룬 최초의 승리였고 전쟁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값진 승리였다.

"북, 계곡 따라 상주로 이동 중"
제보 통해 북한군 전령 생포
매복 2시간 만에 敵 출현 기습
9일 동안 2개 연대 괴멸시켜
인천상륙작전 성공에도 영향


2023060601000176500006862
상주 화서면 상현리 화령장 전투지에 조성된 화령장지구전적비.

◆화령장 지구 상곡리 전투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군의 불법 남침이 시작됐다.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고 7월3일 한강 방어선이 무너졌다. 북한군은 최종 목표인 부산을 향해 진격속도를 높였다. 국군은 미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한 지연작전을 펼쳤으나 후퇴를 거듭하며 밀려났다. 북한군은 경부 축선에 제3사단과 제4사단, 광주-진천 방향에 제2사단, 원주-충주·제천방면에 제12사단, 동해안 축선에 제5사단을 각각 투입해 공세를 펼쳤다. 그러다 중부지역에서 남진하는 제2사단과 제12사단 사이에 간격이 형성되자 이를 보강하기 위해 제15사단을 여주-장호원-음성 방향으로 추가 투입했다. 북한군 제15사단은 7월10일 음성을 점령했다. 그리고 괴산-상주로 향했다. 음성지구 전투 후 국군 제1사단은 괴산-미원 일대에서 북한군 제15사단의 전진을 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 제15사단은 제50연대만을 미원 일대에 투입하고 주력부대인 45연대와 48연대는 국군이 배치되지 않은 속리산 동쪽으로 진출시키고 있었다. 바로 화령장 일대다.

화령장은 상주 화서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지만 보은과 괴산에서 상주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다. 때문에 예부터 장이 발달해 장터의 이름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된 곳이다. 상황은 급박했다. 화령장을 적에게 돌파당하면 상주는 물론, 그 후방의 대구까지 큰 위협에 놓이는 상황이었다. 국군 제17연대는 화령장 일대에서 그들을 저지하기로 결정했다. 7월17일 아침, 화령장을 지나던 17연대 1대대의 트럭을 지역주민 엄봉림씨가 막아섰다. 엄씨는 국군에게 '화령장 계곡 길을 따라 북한군이 상주로 이동하고 있다'는 첩보를 전했다. 대대장은 이를 바탕으로 화령장 일대를 정찰하던 중 화서면 상곡리에서 자전거를 탄 북한군 전령을 생포했다. 그는 '인민군 15사단 48연대 병력이 상주로 접근 중'이라는 내용의 통신문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정황을 확인한 17연대 1대대는 화령장 계곡 3부 능선에 각 중대를 매복시키고 적을 기다렸다.

매복에 들어간지 2시간 후, 북한군 제48연대의 도보부대와 각종 보급물자를 실은 우마차가 나타났다. 그들은 국군의 매복을 모른 채 화령초등학교 송계분교와 상곡리 일대에서 짐을 풀고 저녁 취사 준비를 시작했다. 북한군이 저녁 배식을 시작할 무렵인 오후 7시30분, 국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국군의 기습은 어두워질 때까지 1시간가량 계속됐고 북한군은 저항 한번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국군은 퇴로를 차단하고 밤을 지낸 뒤 이튿날 잔적들을 소탕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 17연대는 북한군 250여 명을 사살하고 30여 명을 생포하였으며 박격포 20문과 대전차포 7문, 소총 1천20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화령장 전투의 대승은 마을 주민의 신고와 대대장의 신속한 판단이 합쳐진, 민과 군이 합동으로 이뤄낸 승리였다.

2023060601000176500006863
화령장전투전승기념관 옆에는 6·25전쟁 때 마을 아이들을 지켜줬다는 전설을 간직한 느티나무가 서 있다.

◆동관리·갈령·장자동 전투

다음 날인 7월18일 새벽, 국군 17연대 주력인 2대대와 3대대가 화령장 지역에 도착했다. 1대대의 상곡리 전투 현장을 둘러본 17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이 지역으로 오는 북한군이 더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화령장 북쪽 갈령을 중심으로 수색을 지시했다. 오후 2시 30분, 수색대는 자전거를 타고 갈령을 넘어서는 인민군 2명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북한군 15사단장의 명령서를 지니고 있었는데, 전날의 전황 보고를 독촉하는 내용과 함께 '48연대와 45연대가 함께 김천 방면으로 진출할 준비를 하라'는 작전 명령이었다. 북한군은 화령장에서 선두 병력들이 괴멸한 것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 제17연대장은 화령초등학교에 대기 중이던 제2대대를 봉황산(741m) 너머 동관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매복시켰다. 동관리는 갈령고개 아래 계곡에 인접한 작은 마을이었다. 예비인 제3대대는 제2대대 좌측인 동관리 장자동으로 이동하였다.

7월21일 오전 5시30분, 매복에 들어간 지 사흘째 되던 새벽이었다. 2대대의 진지 앞으로 정체불명의 부대가 모습을 보였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었다. 2대대는 바로 공격을 하지 못한 채 정체불명의 부대에 대해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바퀴 달린 기관총 등의 소련(러시아)제 무기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 2대대장은 기습공격을 지시했다. 오전 6시30분, 제2대대와 북한군 간의 교전이 시작되었고 동관리 계곡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기습 사격을 받은 북한군은 그대로 무너졌다. 아침 8시가 되어 안개가 걷히자 977번 도로와 논바닥에 즐비한 북한군의 시체와 군장비가 국군의 시야에 선명하게 잡혔다. 소탕을 완료한 오후 2시, 제2대대는 북한군 350여 명을 사살하고 26명을 생포했으며 박격포 16문, 반전차포 2문, 기관총 53정, 소총 185정 등 수많은 군수품을 노획한 전과를 확인했다. 아군도 4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부상을 당한 피해를 보았지만 대승이었다.

큰 타격을 입은 북한군은 동관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국군 제17연대장은 군단사령부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제1사단 예하의 11·12·13, 3개 연대가 화령장 일대에 투입되었다. 7월23일과 24일 제11연대는 갈령 부근에서 북한군을 공격했고, 23일에서 25일 제12연대가 장자동 부근에서 북한군과 격전을 치러 결국 북한군을 격퇴했다. 이때의 전투가 '갈령 전투'와 '장자동 전투'다. 이로써 북한군 제15사단과 일주일 넘도록 교전을 벌이고 진출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 국군 제1사단은 새로 투입된 미군 제25사단에게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상주로 이동하였다.

◆전쟁의 흐름을 바꾼 화령장 전투

화령장지구전적비에서 문장대 방향으로 가면 신봉리, 상곡리, 하송리, 동관리를 지나 갈령으로 이어진다. 이 길 전체가 전쟁터였다. 북한군은 이곳에서 제15사단의 2개 연대가 괴멸되는 참패를 당했고 병력과 장비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로 인해 상주를 점령한 후 일거에 대구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전선 사령부의 계획은 좌절되었고 북한군의 진격은 1주일 이상 지연되었다. 또한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계를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두 달 뒤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지기 전까지 전선을 지탱할 시간을 벌게 됐다. 이 패전으로 북한군 15사단은 해체됐고 국군은 장병 모두가 1계급 특진의 포상을 받았다. 그리고 2개월 뒤인 9월, 국군 17연대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여 서울 수복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송리에는 '화령장전투전승기념관'이 있다. 17연대 1대대가 승리를 거둔 화령초등학교 송계분교가 있던 자리다. 2018년에 개관한 기념관은 6·25전쟁의 전반적인 역사를 알려주는 호국역사관과 화령전투를 상세하게 소개하는 화령 전투관으로 구성돼 있다. 두 전시관 사이에 시계가 있다. 시계의 시간은 1950년 6월25일을 기준으로 흐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날로부터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종전이 되는 날, 시계는 멈춘다. 기념관 앞마당에 느티나무가 서 있다. 저 커다란 줄기 속에 그날의 기억은 고스란할 텐데, 팔랑이는 이파리들은 평온하기만 하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화령전승기념관. 한국전쟁과 화령장 전투, 상주문화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