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형의 스포츠와 인문학] 축구로 수명을 늘리는 방법···월드컵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과 열정적 응원의 기적

  • 박지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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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30  |  수정 2023-06-30 07:59  |  발행일 2023-06-30 제37면

최석현
지난 4일(현지시각) 아르헨티나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8강전 한국 대 나이지리아의 경기에서 최석현이 연장 전반 헤더골을 넣은 뒤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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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형 (문화평론가)

최근에 어떤 책을 읽다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남았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이 무척 소중하고 간절해진다는 문장을 본 적이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내 인생에 바다를 볼 일이 몇 번이나 남았을까' 자문해 보면, 지금 눈앞에 펼쳐진 심심한 바다가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진다는 것. 그런데 사실 바다를 보는 것은 원한다면 꽤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그렇게까지 간절하지 않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년에 한 번 만나는 모임 따위가 되면 이제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단풍놀이나 벚꽃 축제 같은 연간 행사가 되면 이젠 계산하기도 어렵지 않다. 딱 자신의 남은 수명만큼 남은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다 보니 2002년 월드컵 때 보았던 CF가 떠올랐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한 젊은 청년 커플이 풀밭에 앉아 "대-한민국!" 하고 외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며 이젠 결혼을 한 그 커플 부부가 아기를 안고 "대-한민국!" 하고 외친다. 다음은 아이가 둘이 되어 있고, 그다음은 아이들이 어느덧 커서 청년이 되어 있다. 당연히 처음의 그 청년 커플은 이제 초로에 접어들어 있다. 마지막 장면은 당연히 백발이 된 노부부가 아들, 며느리, 딸, 사위와 손자, 손녀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외치는 장면이다. 내가 처음 그 CF를 봤을 당시에 나는 젊은 청년 커플에 해당되는 나이였고 내게는 족히 두 자릿수의 월드컵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그 CF의 아들, 며느리의 연배가 된 지금은 아마도 한 자리 숫자의 월드컵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최악의 경우만 아니라면 아직 내겐 월드컵이 충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백발 노부부의 입장이 된 우리 부모님의 월드컵이다. 6번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5번만 남아있어도 좋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적은 4번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믿기 싫지만 만약 그보다 아래라면 이제는 한 경기, 한 경기가 무척 소중하고 간절해진다. '고작 축구 경기'가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 뇌 과학자에 의하면 인간의 수명을 늘리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고 한다. 인식을 촘촘하게 가져가면 같은 수명 아래에서도 우리는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꽤 흥미롭다. 우리 모두는 유년 시절, 1년, 1년이 매우 더디게 갔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30대에는 속담 그대로 간밤에 서리가 온 듯 40대가 되어버린다. 뇌 과학자는 그것은 인식의 성김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 설명한다. 고로 만약 인식의 빈도를 끌어올리면 우리는 결과적으로 수명 연장의 꿈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남은 내 인생의 모든 축구 경기를 월드컵처럼 치열하게 시청하기로 결심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U20 월드컵, 난 우리 대표팀의 7경기 중 4경기를 봤고, 그중 3경기를 부모님과 함께 봤다. 운전을 싫어하는 나는 새벽에 야트막한 산길을 50분이나 걸어가 기어코 그 경기들을 본가 거실의 TV로 보고야 말았던 것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내가 아는 유일한 부모님 장수의 비결은 인식의 빈도를 늘리는 것밖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최석현이 16강과 8강 결정적인 순간에 넣은 2골로 우리는 이번 대회에서 3경기나 더 치르는 경사를 누리게 되었다. 3경기라. 보통 월드컵이 3경기쯤 하고 돌아오는 대회이지 않던가. 그렇게 보니 최 선수의 골들은 나와 내 부모님의 수명을 4년이나 연장시켜 준 것에 다름없었다. 최 선수, 고마워요. 누구는 한국 축구를 보다가 수명이 준다던데, 우리 가족은 오히려 늘었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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