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카페 속 수많은 나를 돌아보며

  • 안효섭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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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27  |  수정 2023-06-27 07:57  |  발행일 2023-06-27 제17면

[문화산책] 카페 속 수많은 나를 돌아보며
안효섭 (큐레이터)

할 일이 많아서 오늘은 카페를 삼 탕 중이다. (일 탕! 이 탕! 삼 탕!) 카페인의 기운을 빌려 미루고 미루던 일들을 해결하고, 어려운 부탁을 해결했다. 많은 일이 쌓여 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멍을 때리는 일이다. 나는 이 시간을 '맘껏 싫어하는 시간'이라고 부른다. 충분히 싫어하고 나면 (모든 일은 귀찮은 부분이 하나는 있다) 남은 것은 긍정밖에 없으니, 긍정의 기운으로 일들을 해치우려 한다.

예전부터 카페는 나의 안식처였고 피난처였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집과 학교에서 잘도 공부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참 대단하다. 요즘에는 중고등학생들도 카페에서 많이 공부하지만, 그때는 카페에서 공부하는 것이 흔하지 않았다. 대학을 들어간 후 카페에서 공부하고 작업하는 시간을 맛보게 되었다. 세상에! 새로운 세계였다.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과제 제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카페는 나를 포근히 안아 주었다. 카페인의 힘을 빌리고, 커피의 향에 기운을 내고, 옆에서 나처럼 밤을 새우는 다른 이들에게 위로를 받았다. 야행성인 나를 받아주는 곳이 있다니 좋은 세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대학을 다니는 수많은 날을 카페에서 보내고 졸업을 했다. 나중에 공부하기 좋은 카페를 만들어서 내가 받았던 은혜로움을 사회에 되돌려주겠다는 생각과 함께.

회사에 다닐 때는 예전처럼 야행성일 수 없었다. 그래서 밤에 가지는 않았다. 가끔 산뜻한 기분으로 회의하고 싶을 때 팀장님과 함께 카페에 갔다. 공간이 바뀌니 머리가 개운하고 참신한 생각이 많이 났다. 또 너무 신경을 써서 일과를 마치고 온몸에 힘이 없던 날 집에 가기 전에 쓰러지듯 카페에 갔다. 그곳에서 샌드위치 따위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멍을 때리며 하루를 정리했다. 주말에는 회사에 필요한 것들을 찾으러 여러 책과 함께 카페에 갔다. 나만을 위한 강연이 열린다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그리고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자연도 보았다. 그러다 문득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카페인으로 숨겨두었던 고단함이 주말 동안 해결이 되지 않은 날이었다.

고향에 돌아와서 수학과 과학을 가르쳤다. 나의 부족함에 하루하루 몸서리를 치며 다시 야행성이 되었다. 불안으로 잠 못 이루던 날들을 다시 안아준 건 카페였다. 밤새 준비하고 수업을 하고 밤새워 준비하는 나날을 보냈다. 모자란 나를 채찍질하고 또 하고 또 하다 문득 깨닫게 되었다.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커피를 마시며 무던히 많은 밤을 지새우고 나서야 나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의 일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예술과 함께인 지금 일이 마음에 든다. 나중에 공부하기 좋고 미술이 함께 하는 카페를 열었으면 좋겠다. 카페에 있었던 나를 주욱 떠올렸을 뿐인데 내 인생의 그림이 그려지다니. 변화의 매 순간 카페가 있었다는 사실에 문득 뭉클하다. 사실 오늘은 좋은 카페와 좋은 예술에 관한 어떤 걸 쓰려 했는데, 추억이 이겨버렸다. 문화산책이라는 코너에 이 글을 써도 될까 고민하지만 "나에게는 카페가 문화였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밤이다.

안효섭<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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