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산책] 가와바타 야스나리의'설국'…허무주의가 그려낸 선명한 아름다움

  • 정향재 교수 한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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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7-07 09:32  |  수정 2023-10-11 13:28  |  발행일 2023-07-07 제21면
열정적인 사랑에 떠나버리는
시마무라의 심리 섬세한 표현
어두운 차창에 비친 환영처럼
비현실적 상징 미를 찾는 여행

정향재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에서는 선정이유로 "일본인의 마음 정수를 뛰어난 감수성으로 표현하는 그 서술의 능숙함"을 꼽았다. 이러한 선정이유는 당시 69세였던 가와바타 문학 전체를 통괄하는 평가였기에 상당히 의미 있다고 하겠다.

이 평가에 부합하는 작품은 여럿 있을 터인데, '설국'은 첫 번째로 꼽히는 작품이라 하겠다. 가와바타 자신도 '설국'에 대해 "해외에서 읽으면 회향의 마음을 가지게 한다"('독영자명')고 평하고 있어 일본적 분위기, 전통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가와바타의 모든 작품이 '일본적'으로 평가해도 좋은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초기에 가와바타는 신감각파 작가로 활동했다. 신감각파의 목표는 표현의 혁신이었는데, 그 방법으로 서구문예에 의지하는 바가 컸다. 또한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영화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시각이미지의 활자표현에도 다양한 관심이 많았고, 영화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1년에 문단에 등단한 가와바타는 1926년에는 '이즈의 무희'로 대중적인 인기도 얻었다. 1931년에는 신심리주의 작가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와 모색을 거친 후 1935년부터 발표하게 된 것이 '설국'이고, 완성은 1947년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설국'은 그때까지의 가와바타의 문학적 경험의 축적을 자양분으로 삼아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게 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시마무라의 허무, 비현실적인 미 '설국'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가자 설국이었다'라는 일본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설국'의 서두 문구로, 현재에도 끊임없이 패러디되어 재생산되고 있다. 여기에서 터널은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인 설국의 경계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경계는 시마무라(島村)의 생활의 공간 도쿄와 설국을 나누는 것이며 일상과 비현실의 세계, 도시화와 전통의 세계를 구분한다.

'설국'은 시마무라가 '설국'을 세 번 방문하며, 게이샤 고마코(駒子)와의 사랑, 신비로운 소녀 요코(葉子) 등과의 관계가 그려진 소설이다. 설국을 들어서며 묘사되는 차창에 그려지는 신비로운 소녀의 모습은 이 소설이 그려낼 미적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두운 차창에 비치는 환영 같은 비현실적 상징 미를 찾아 떠나는 것이 설국으로의 여행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마무라는 부모의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의 일은 서양무용에 대한 평론을 쓰는 것이었는데, 직접 무용을 보는 것이 아닌 사진, 그림을 보며 글을 썼다. 그는 원래는 일본무용계에서 활동하였는데, 무용계의 혁신을 위해 행동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서양 무용계로 터를 옮겼다. 즉, 시마무라는 현실적인 움직임, 타인에 영향을 끼쳐야 하는 무게를 거부하며 생활하는 환영을 좇는 허무주의자인 것이다. 그의 생에 대한 그러한 태도는 '설국'에서 고마코를 대한 자세에도 드러난다. 고마코를 만나러 설국을 방문하였음에도 정작 그녀의 열정이 그를 향해 달려옴을 느끼면 설국을 떠나고 만다. 현실의 일상을 떠나 비현실의 세계를 찾아온 시마무라였지만, 설국에서의 관계에 충족하고 그것이 넘쳐 또 하나의 자신을 얽어맬 일상이 될 여지가 있으면 떠나버리는 것이다.

◆'헛수고'이기에 아름답다

작품 첫 부분에서 시마무라가 '설국'을 향하는 목적은 '손가락이 기억하는 여자'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 여인은 고마코였다. 고마코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게이샤가 아니었다. 두 번째 방문하니 그녀는 게이샤가 되어 있었다. 시마무라와의 관계는 첫 번째 방문부터였는데, 방문횟수를 거듭할수록 그녀는 시마무라에게 열정적으로 다가온다.

고마코는 정혼자인 유키오(行男)를 위해 게이샤로 나섰다고 한다. 우연히 들른 그녀의 집에서 고마코의 담담한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의 일기장을 본다. 관심 있는 공연, 하루하루의 일상들을 꼼꼼히 적어 내려 간 것인데 그것을 보며 시마무라는 '헛수고'임을 느낀다. 자신의 헌신적인 행위, 삶과 사랑에 열정적인 모든 것이 헛수고임을 알았을 터인 고마코를 보며 그녀의 삶이 헛수고이기에 아름답다고 감동하고 만다. 그녀의 시마무라에 대한 사랑 또한 '헛수고'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향해 뜨겁게 달려오는 그녀의 마음을 느낄 때 시마무라는 설국을 떠나버린다.

◆'은폐'의 세상 '설국'

'설국'은 철저하게 시마무라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시마무라가 보고, 듣고, 느낀 것, 그가 알고 있는 것만이 그려진다. 예를 들어 시마무라가 설국을 떠나있을 때 설국의 상황은 독자들에게는 전혀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다. 전지적 입장을 거부당하며, 독자들은 시마무라의 눈과 심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고마코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리고 고마코와 요코, 유키오의 관계는 사실은 어떠한지 알 수가 없고 추측에 의존하게 만든다. 작품 속에 그려지는 것은 시마무라가 설국에 와서 본 고마코, 요코 그리고 설국의 자연과 풍속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설국'이라는 이야기는 반쪽이 숨겨진 모습으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숨김'의 방법은 서술 시점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창작 시기는 1935년부터 1947년에 걸쳐져 있는데, 그 시기는 일본의 전쟁 확장기 그리고 패전의 시기를 거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시대상이라는 일상이 제거되어 있고, 지명조차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소설 창작에 관해 가와바타는 소설의 창작지와 배경이 니가타현의 '에치고 유자와(越後湯澤 )'임을 밝히고 있고, 작품에 그 지역의 자연과 풍속을 세세하게 그려냈다. 그러면서도 지명이 아닌 '설국'이라는 일반명사로 일관하고 있다. 이것은 시마무라의 일상제거와 같은 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당시 질곡의 시간을 거쳤던 사회상을 '은폐'하는 것에도 유효하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설국'은 현실 세계의 에치고유자와 온천이면 안 되는 것이었다. 눈이 많이 쌓인 '설국'이라면 어디나 괜찮은 것이었고, 반드시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그 눈 속에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삶도 사랑도 시대도 모든 것이 뒤덮여 흰 눈의 세계로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뒤덮인 눈 속에서 시마무라의 눈과 심리를 통해 고마코의 사랑도, 요코의 신비스러움도 그리고 설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속도 선명하게 그려낸 것이 '설국'인 것이다.

정향재 교수 (한남대)
공동기획: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HK+사업단


정향재

현재 한남대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일본 근현대문학을 전공했다. 세부전공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이다. 가와바타를 전공으로 삼은 것은 가와바타의 서정적이면서도 처연한 슬픔이 느껴지는 문장, 죽음을 다루는 독특한 시선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연구분야는 가와바타 문학과 주변예술, 특히 영화와 무용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그 외 일본 패전기의 문학자들의 인식, 원폭문학에 대해 힘을 기울이고 있다. 문학연구, 교육 이외에 좋은 일본문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번역자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할 희망을 가지고 있다.

대표논문으로 '1930년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단상-영화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설국과 그 시대 -은폐된 배경으로서의 공간과 시대성' '일본 현대문학에 있어서의 패전' 등이 있다. 번역으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원작 '잠자는 미녀'(현대문학), 하라 다미키의 '하라 다미키 단편집'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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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향재 교수 한남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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