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산책]- 베르그손 '창조적 진화'

  • 주재형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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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0-06 08:40  |  수정 2024-02-13 08:57  |  발행일 2023-10-06 제25면
과학이 말해주지 못하는 생명의 본질, 철학으로 풀어내다

다윈의 진화론 전적 수용하면서도
수동적 환경적응했단 주장엔 반대
생명의 창조적 운동 설명과정 탁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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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형 교수 (단국대)


철학자가 노벨문학상을 받기란 매우 드문 일이고, 그마저도 1964년 수상을 거부한 장폴 사르트르가 마지막이었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 철학자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은 루돌프 크리스토프 오이켄(1908년 수상), 버트런드 러셀(1950년 수상), 앞서 말한 사르트르, 그리고 우리가 오늘 이야기할 앙리 베르그손(1927년 수상), 단 네 사람뿐이다.

그런데 철학자가 문학상을 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리 영예로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철학자는 엄밀한 논리와 보편적 개념 체계로 현실 세계를 해명하는 반면, 예술가는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허구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러니 문학상을 받은 철학자란 한눈파는 철학자가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노벨문학상을 받은 네 철학자 중에서 특히 베르그손은 철학과 예술이라는 상반된 인간의 정신 활동을 무리 없이 융합했다. 노벨문학상 위원회는 그에게 상을 수여하는 이유로 베르그손의 "풍부하고 생생한 생각들, 그리고 이 생각들을 표현하는 뛰어난 솜씨"를 들었다. 이 함축적인 평가에 따르면, 베르그손은 철학자로서 풍부하고 생생한 생각들을 품었을 뿐 아니라 이 생각들을 언어적으로 표현해내는 데에도 탁월했다.

사실 베르그손의 철학에서 이 두 가지, 곧 생각과 언어적 표현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1859년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자 출신의 음악가 아버지와 영국계 유대인 출신의 어머니가 이룬 가정에서 출생한 베르그손은 프랑스 파리의 엘리트 교육 코스를 밟으면서 성장한다. 그는 과학적 재능이 뛰어났음에도 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서, 인문계 최상위 대학인 고등사범대학 졸업 후 클레르몽페랑의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면서 첫 번째 저작이 될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한다. 1889년 출간된 이 논문에는 '의식의 직접 소여들에 관한 시론'이라는 다소 길고 학술적인 제목이 붙었다. 이 제목은, 훗날 영어 번역본을 출간하면서 작품의 주제 의식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시간과 자유의지'라는 제목으로 바뀌게 된다.

이 책의 중심 주장은, 무수한 감정과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서로 뒤엉키며 이어지는 우리 마음의 내적 흐름이야말로 진정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획일적으로 모두에게 똑같은 속도로 흐르는 시계의 시간은 인위적 약속의 산물에 불과하다. 베르그손은 각자가 경험한 과거의 체험들이 현재의 경험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과거와 현재가 각자의 삶 속에서 얼마나 분리될 수 없게 연속되어 있는지를 정묘하게 서술한다. 이 저작에서 독자는 고통의 감각에서부터 깊은 사랑의 감정에 이르는 다양한 의식 상태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접하게 된다. 베르그손이 '지속'이라고 일컫는 진정한 시간 개념은 바로 우리 인간의 의식적 경험에 대한 거의 예술가적인 묘사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고 전달 가능한 것이다. 마치 소설가가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몇 개의 낱말들을 통해서 인물의 감정을 독자 스스로 경험하도록 유도하듯이 말이다. 베르그손의 새로운 철학적 관념들은 그에 부응하는 새로운 언어적 표현 방식에 의해서만 드러낼 수 있는 것이었다.

베르그손은 철학이 과학과 같은 엄밀한 방법을 따르며 실증적인 경험 증거들에 근거해 진보하는 학문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 못지않게 철학은 예술과 같이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구체적인 경험을 최대한 언어 안에 담아내는 창조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학적 사유로 포착한 세계의 규칙성과 엄밀성을 배경으로 할 때 그러한 과학적 사유를 벗어나는 섬세한 정신과 생명의 차원이 어렴풋이 전경에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베르그손의 철학은 과학의 틀을 빠져나가는 정신과 생명의 모습을 독창적인 예술적 감수성으로 감지하고 그려낸다. 그는 20세기에 과학과 예술이 공존하는 새로운 철학 모델을 창안한 것이다.

이러한 철학관이 가장 높은 완성도에 이른 저작이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1907년작 '창조적 진화'다. 이 책의 제목 자체가 이미 이 책이 제기하는 철학적 도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당대에 한창 논쟁 중이던 다윈의 진화론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과학적 진화론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진화론이 말하는 대로 생명체들은 지구상에서 진화한 것들이며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은 생명 진화란 다양한 생명체들이 주어진 환경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적응 과정이라는 진화론의 주장에는 반대한다. 생명체들은 환경의 제약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새로운 생명 형태들을 창조하며, 생명 진화의 과정 전체는 무기 물질을 가로질러 세계 안에 자유를 도입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을 무기 물질에서부터 시작하는 진화의 산물로 보면서도 생명의 본질 자체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물질에 저항하면서 물질 안에서 자유의 경향을 실현하는 독립적인 힘으로 본 것이다. 생명의 진화는 인간 의식의 지속처럼 창조와 새로움을 향하는 경향성이라는 이 저작의 주장은, 당대의 과학적 진화론보다 한 발 앞서 나아가며 자유로운 생명,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고전적인 관념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생명의 창조적 운동을 포착하기 위해서 베르그손은 여러 가지 언어적 이미지들을 동원한다. 무수한 생명체들을 가로지르는 단일한 생명적 본질의 전체적 운동을 도약, 곧 뜀뛰기로 표현하기도 하고, 물질과 생명의 대립적인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쇳가루를 가로지르는 보이지 않는 손의 이미지를 동원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물질적 우주를 창조한 가장 근원적인 생명의 본질은 여기저기 틈이 나 있는 용기에서 분출하는 수증기 가닥들로 형상화된다. 러셀은 이 저작을 두고 경멸의 의미를 담아 철학 저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시라고 말한 바 있는데(정작 이렇게 말한 러셀 자신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담아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는 근대 자연 과학의 성취 위에서 그려낸 장대한 우주적 서사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창조적 진화'는 베르그손이 무명의 젊은 학자이던 시절 발췌 번역하여 출간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근대적 언어로 다시 쓴 저작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당대의 진화론과 생물학의 과학적 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이러한 과학이 말해주지 못하는 생명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논구하는 이 저작은 베르그손을 단박에 세계적인 철학자로 만들어 주었다. 박사학위논문과 두 번째 저작인 '물질과 기억'(1896)을 통해 프랑스의 신진 철학자 그룹 선두에 있었던 그는 '창조적 진화'를 통해 당대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철학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베르그손이 당대 진화론에 맞서 내세운 여러 실증적 논변들은 현대 생물학과 진화론의 수준에서 논박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창조적 진화'의 실증적, 논리적 논변들이 힘을 잃고 나면 남는 것은 그저 우아한 표현들로 포장한 근거 없는 몽상적 사변들이 아닐까? 이러한 신랄한 평가도 가능하겠지만, 그와 함께 어쩌면 이 저작의 여전히 살아 있는 핵심을 놓치게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과거의 틀린 철학 이론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를 던진다는 점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저작이다. 철학과 문학을 종합한 이 책이 발휘하는 강력한 설득력을 어떻게 현대과학의 성취들 위에서 갱신하고 계승할 것인가라는 과제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제기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으로 남아 있다.


주재형 교수는 프랑스 파리에서 베르그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단국대 철학과에 재직 중이다. 현재 단국대 철학과에서 '생활과 철학' '서양근대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을 강의하고 있으며, 프랑스 근현대 철학사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한편 현대과학의 수준에 걸맞은 새로운 우주론 형이상학의 구축을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철학연구회 총무이사, 한국프랑스철학회 총무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단국대 철학연구소 '철학논고'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역서로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문학과지성사, 2008, 공역), '현대 프랑스 철학' (길, 2014), 저서로 '철학, 혁명을 말하다'(이학사, 2018, 공저), '서양근대교육철학'(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공저), '푸코와 철학자들'(민음사, 2023, 공저)이 있으며, '베르그손의 순수 기억의 존재 양태에 대하여'(2016), '들뢰즈와 형이상학의 정초'(2017), '데리다: 진리의 탈구축'(2020), '러브크래프트와 철학: 반우주로서 생명'(2021), '노화의 자연경제'(2022) 등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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