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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석윤 논설위원 |
새해가 밝았어도 국민들 마음은 밝지 못하다. 12·3 비상계엄 사태만 해도 힘든 판에 최악의 여객기 참사까지. 설상가상의 역대급 시련이다. 국민들이 받은 충격과 공포가 어마어마하다. 더 큰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비상계엄 사태 후폭풍이 거세지는 현실이다. 계엄을 주도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사법처리 문제로 온 나라가 흔들거린다. 급기야 윤 대통령을 체포하려는 공수처·경찰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호처 간 물리적 대치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런 난리를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지 혼란하고 답답할 따름이다.
'일어날 일만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 세상사 만고의 진리로 통하지만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도 있다. 비상계엄이 그렇다. 사태 발생 한달이 지났건만 아직도 윤 대통령이 왜 그랬는지를 모르겠다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물론 윤 대통령 나름대로는 수차례에 걸쳐 계엄을 단행한 명분을 밝혔다. 핵심을 추려보면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거대 야당의 패악질(정부 관료에 대한 탄핵 남발, 정부 예산안 삭감)을 응징하고, 총선 부정선거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서다. 자신이 구국의 결단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타난 결과는 정반대다. 그의 '결단'으로 인해 멀쩡했던 나라가 '절단'날 위기에 처했다.
윤 대통령 주장에도 일말의 근거는 있다. 이재명 대표 방탄을 위한 민주당의 입법권력 전횡은 분명 문제가 많다. 그렇다고 군대까지 동원해 그들을 일거에 척결하겠다는 발상은 아무래도 납득이 안 간다. 층간소음을 내는 윗집을 아예 불 싸지르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불이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을 태워버릴 수 있음을 몰랐을까. 윤 대통령에 대한 미스터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진정 비상계엄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그래서 반대세력을 뿌리 뽑고 자신이 난세의 영웅이 될 것으로 확신했을까. 아직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걸까.
지금까지의 여러 정황을 보면 윤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에 빠져 살아온 듯하다. 현실과 동떨어진 일종의 '가상세계'를 믿은 것으로 보인다. 그 세계에서 '나=대통령=국가'라는 인식을 강화시켜 왔던 건 아닐까. 그러면 나를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반국가세력으로 간단하게 정리된다. 역사가 증명하듯, 권력자의 이분법적 사고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윤 대통령처럼 자신을 절대 선(善)이라고 여기게 되면 이를 따르지 않는 상대는 악마화되고 제거 대상이 된다. 그동안 윤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자유'의 뜻이 궁금했는데 이제 조금 알 것도 같다. 비상계엄을 포함해 내 마음대로 나라를 통치할 자유였던 듯하다.
판타지와 광기로 가득 찬 가상세계를 대통령 혼자서 구축한 건 아니다. 조력자들이 있다. 특히 대통령이 심취해있다는 극우 유튜브들은 부정선거를 비롯한 온갖 음모론의 진원지다. 지금도 그들과 한 줌 극우세력들은 부정선거론을 확대재생산 하며 혹세무민한다. 또 대통령과 배우자를 둘러싼 법사, 도사, 무속인들도 샤머니즘적 주술정치를 이끌었을 것이다. 어쩌면 과거 대통령 손바닥에 적힌 '王'자가 국난의 신호탄이었을 수도. 이제라도 대한민국은 역사의 교훈에 주목해야 한다. '철인'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개인적 한계와 과오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언제까지 제왕적 권력을 몰아주는 위험을 계속 감수해야 할까. 이번 사태가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이다.허석윤 논설위원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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