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수리부엉이가 보내는 편지

  • 감정원 독립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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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5-20 06:00  |  발행일 2025-05-19
감정원 독립영화감독

감정원 독립영화감독

지난해 8월, 대구 동구 방촌동과 수성구 고모동 사이 금호강변에 위치한 팔현습지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대구시청 앞, 팔현습지 국가습지 지정 기자회견이 있던 날이었다. 오랫동안 팔현습지에 터를 잡고 살던 깃대종 수리부엉이 부부 내외의 편지였는데, 날이 더워서일까, 사람들의 방문과 촬영이 부담스러웠을까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동안 수리부엉이 '팔이' '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수리부엉이들은 둥지를 함부로 바꾸지 않는 특성을 가진 '정주성 텃새'라 아마 근처 둥지를 만들어 잠시 이동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래는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편지 전문이다.

[이 땅을 디디고 사는 모든 생명들에게.]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처서가 지나자, 푸르던 팔현습지에는 아주 천천히 가을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팔현습지에는 산과 강을 가르는 보도교 공사 계획을 알리는 노란 깃발이 꽂혀있습니다. 되살아난 금호강에는 다시금 생명들이 모여들었고, 팔현습지에는 법정보호종 17종을 포함한 야생생물의 집이자 최후의 보루인 숨은 서식처가 되었는데도 말이죠.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사람들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하지만 그들은 아직 잘 모르나 봅니다. 자본의 지배 아래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고, 그 모두를 상품으로 만들며 확장하고, 땅을 짓밟고 부수는 사람들이 참 안타깝고 불쌍합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팔현습지 하식애 끝 나무 아래 지은 집으로부터 잠시 떠나있으려 합니다. 오늘따라 벌과 나비가 나풀거리고 왕버드나무에서 떨어진 푸르고 동그란 이파리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이 풍경이 참으로 아름다워, 자꾸만 뒤돌아보게 됩니다. 생태계와 인간 사회가 서로를 필요로 할 때 우리 부부는 다시 이곳, 아름다운 우리들의 집, 팔현습지로 돌아오겠습니다. 이 땅을 디디고 사는 모든 생명들에게, 오늘도 안부 인사를 건네봅니다.

- 2024. 08. 28, 팔현습지, 수리부엉이 부부 내외 드림.

올해 2월 초, 다시 모습을 드러낸 팔현습지의 수리부엉이 '팔이' '현이'는 세 마리의 어린 유조 수리부엉이들과 함께였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언제든 참으로 귀한 일임에 안도와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한 번 망가지면 되돌릴 수 없는 우리 주변의 생태계를 지키고 그대로 두는 것이 결국 우리,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는 일이 아닐지, 팔현습지의 수리부엉이 가족을 보며 삶의 진리를 하나 더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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