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간송미술관 대외협력팀 윤병인 책임
"지방러는 덕질도 마음껏 못 해요." 오랜만에 만난 후배들과 식사 자리를 가지던 중에 나온 말이다. 아이돌의 삼촌팬을 자칭하던 후배가 웃으며 건넨 말이지만, 그 안에는 지방러들의 씁쓸한 현실이 담겨 있었다.
'덕질'은 특정 분야를 깊게 파고들고 열정을 쏟는 활동을 뜻한다. 과거에는 게임, 애니메이션, 아이돌 등에 국한되어 사용되었지만, 최근에는 특정 취미에 열중하거나 전문가 수준의 열정을 드러내는 활동 전반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덕질의 대상인 K팝, 연극, 전시회 등 대부분의 문화 콘텐츠는 여전히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이로 인해 지방에 거주하는 '덕후'들은 '거리의 벽'을 실감할 수밖에 없다. 치열한 티켓팅 끝에 콘서트 티켓을 간신히 구하더라도 서울까지의 왕복 교통비와 숙박비를 감당해야 하며 하루 이상의 일정을 비워야 한다. 수도권 덕후들에게는 '퇴근길 덕질'이 될 수 있는 일상이 지방 덕후에겐 큰 결심과 경제적 지출을 요구하는 부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덕질의 격차는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 공연예술조사'에 따르면, 전국 공연시설의 33.9%가 서울에, 수도권 전체로는 50.4%가 집중되어 있다. 공연 건수 역시 전국의 61.1%가 수도권에서 이루어진다. 반면 대구는 공연시설 5.7%, 경상권 전체의 공연 건수는 12.9%에 불과하다. 다른 덕질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성덕(성공한 덕후)가 되기 위해서는 수도권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문화 분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수도권에 집중된 문화 인프라는 단순한 편중을 넘어, 지역 인구 유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질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가치가 된 지금, 내 친구들과 후배들이 하나둘 수도권으로 떠나는 이유는 단순히 일자리 때문만은 아니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문화생활, 즉 '덕질할 수 있는 환경'이 그들을 자연스럽게 서울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같은 덕질을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지방러는 웁니다"라는 자조 섞인 글들이 올라온다. 덕질하러 서울까지 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위의 시선과 장벽 때문에 쉽게 말하지 못했던 불만들을 털어놓으며, 그들은 같은 처지의 또 다른 지방의 청년들과 연결된다. 그렇게 서로의 서러움을 공감하고 위로한다.
서울에 가지 않아도 같은 감동과 설렘을 느낄 수 있는 환경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화의 균형일 것이다. 지방러들이 바라는 어디에서든 사랑하는 것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평등한 덕질 지도가 하루빨리 그려지기를 바란다.
윤병인<대구간송미술관 대외협력팀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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