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규완 논설위원
블레어 롤 모델 삼았으면대통령 취임사는 임기 동안의 국정철학을 암시한다. 미리 보여주는 조타수의 방향타 같다. "정의로운 통합정부, 유연한 실용정부"는 이재명 대통령 취임사의 백미다. 이재명의 실용주의가 새 정부 정책에 녹아들 수 있을까.
# 실용주의는 중용이다=공자의 언어 중용(中庸)은 단순히 '중간' '중립'이 아니다. 좀 더 내밀한 함의가 있다. 유학(儒學)에서의 중용은 '언제나 도리에 딱 들어맞게 행한다'는 뜻이다. '중용적 정책'도 그냥 보수와 진보의 중간쯤 되는 정책이 아니다. 중용의 심오한 의미가 '도리에 맞는 언행'이듯 중용적 정책은 현실과 환경에 최적화된 정책을 말한다.
'하르츠 개혁'은 중용 정책의 명징한 사례다. 2000년대 초 진보 성향 슈뢰더 독일 총리와 집권 사민당이 주도한 '하르츠 개혁'은 노동시장 유연화와 실업수당 삭감이 포함돼 노동계의 저항이 컸지만, 잠재성장률 반등과 실업률 개선을 이뤄냈다. 민주당이 드라이브를 거는 '노란봉투법'은 노조 편향적이다. 기업을 고양해야 할 작금의 경제 하방 국면에 최적화된 정책인지 의문이다.
# 실용주의는 효율이다='흑묘백묘론'은 실용주의의 상징적 언어다. 덩샤오핑의 개방·개혁을 웅변하는 경제철학이다. '국가자본주의' 용어 탄생의 근원이자 중국 굴기(崛起)의 시작점이다. '흑묘백묘론'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효율이다. 덩샤오핑이 시장경제를 도입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지금 비루한 사회주의국가로 남았을 개연성이 크다.
중국의 반전(反轉)은 자본주의와 실용주의의 효용성을 실증한다. 송나라 왕안석이 설계한 부국강병책 희녕변법이 왜 실패로 끝났을까. 경제현장의 복잡다단한 메커니즘을 도외시하고 시장의 효율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경제효율을 제고하려면 민간기업의 자율성을 살려야 한다. 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네거티브 규제 방식"을 언급한 건 시의적절했다. 주 52시간 근무제도 효율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연구개발직까지 52시간 규제로 얽어맨다? 비효율의 극치다.
# 실용주의는 조화다=이재명 정부 1기 인사는 실용주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현장 경험, 전문성을 우선했다. 검찰 출신과 측근을 중용한 윤석열 정부 때완 결이 다르다. '경제성장수석' 명칭은 성장 중시의 복선(伏線)으로 판단된다.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추구하겠다는 행간이 읽힌다. 확장이냐 긴축이냐. 재정 및 통화정책도 조화로워야 한다. 승수효과 없는 재정지출과 '닥치고 금리인하'는 물가만 끌어올린다. 고물가 상황에선 서민이 더 죽을 맛이다. 경기 부양과 유효수요 진작의 마중물 역할을 할 최적점을 찾아야 한다.
에너지 믹스는 이재명 정부 실용주의의 가늠자다. 이 대통령은 원자력발전소를 신설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AI 시대의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재생에너지 확대로만 감당할 수 있을까. 트럼프는 미국의 원자력 발전 용량을 2050년까지 4배 늘리기로 했고, 영국은 원전 비중을 15%에서 25%로 높인다. 이탈리아와 벨기에는 탈원전 정책을 폐기했다. 이 지점에서 실용주의 대통령 김대중의 어록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떠올려 본다.
진보정당 총리 토니 블레어는 좌파 도그마에서 벗어나 역동적인 시장경제와 일자리 중심 정책을 펼쳤다. 복지국가 영국의 비효율을 개혁했다. 블레어는 좌파의 사회적 형평성과 우파의 경제적 효율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추구했다. 실용주의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토니 블레어를 롤 모델로 삼았으면 한다. 논설위원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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