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수장고에서 만나는 예술가들의 ‘필적’… 펜끝에 스민 고뇌와 삶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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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9-10 17:05  |  발행일 2025-09-10
단순 기록 넘어… 예술가들의 내밀한 목소리를 듣다
무용가 김상규의 애환부터 연극인 이필동 열정까지
예술인들의 감정과 고민 스며든 손글씨 눈길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열린수장고에서 전시 중인 무용가 김상규(1922~1989)의 원고.<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열린수장고에서 전시 중인 무용가 김상규(1922~1989)의 원고.<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낡은 원고지에, 때로는 빛바랜 종잇조각에 남겨진 글씨들이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근현대 격동기를 살았던 예술인들의 감정과 고민이 스며든 손글씨를 마주하는 순간, 그들의 생생한 내면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대구예술발전소 3층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열린수장고에서 열리고 있는 '필적, 예술가의 내면 풍경'展(전)이 오는 12월31일까지 관람객들을 창작의 고뇌와 삶의 흔적으로 초대한다.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라, 시간이 켜켜이 쌓인 예술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자리다.


전시장에서는 대구경북 출신 또는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예술가들의 자필 원고 20여 점을 전시 중이다. 아동문학가 윤복진·김성도·최춘해, 성악가 이점희, 작곡가 김진균·우종억·임우상, 합창지휘자 장영목, 무용가 김상규, 연극인 이필동 등 다양한 분야 예술가들의 손글씨를 통해 지역 문화예술사의 깊은 맥락을 직접 짚어볼 수 있다.


수장고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무용가 김상규(1922~1989)의 글씨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안동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던 그가 발표회를 앞두고 쓴 인사말 원고에는 "조센징이란 멸시 속에 '이시이 바꾸'의 문을 두드린 것이 18세때 였습니다"라는 글귀가 또렷하게 남아 있어, 일제강점기 예술가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직도 무용예술이 지닌 난제 속에서 자기 마음의 자유로운 표현이 아쉽기만 하는 몸부림에서 다시 막을 열어봅니다"라는 대목에서는 한국 무용을 향한 그의 열정이 시대를 뛰어넘어 다가온다.


대구 연극의 초석을 다진 배우이자 연출가 이필동(1944~2008)의 원고.<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대구 연극의 초석을 다진 배우이자 연출가 이필동(1944~2008)의 원고.<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아동문학가 김성도(1914~1987)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 번역 원고.<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아동문학가 김성도(1914~1987)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 번역 원고.<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필적, 예술가의 내면 풍경展 전시 전경.<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필적, 예술가의 내면 풍경'展 전시 전경.<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대구 연극의 초석을 다진 배우이자 연출가 이필동(1944~2008)의 원고지에는 연극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가득하다. "연극은 배우예술이다. 배우의 연기야말로 연극예술의 핵심이며 그런 뜻에서 배우는 연극예술의 꽃이라 할 수 있다"는 그의 글씨에는 확신과 자부심이 엿보인다. '살아있는 인간 배우→살아 있는 관객'이라 적힌 메모는 배우와 연출가로서 평생을 바친 그의 예술 철학을 묵직하게 증명한다.


전시의 또 다른 발견은 아동문학가 김성도(1914~1987)의 원고다. 영국 작가 로알드 달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번역한 그의 손글씨 원고는 1970~80년대에 480장 분량으로 번역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출판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빛을 보지 못했다. 페이스 자크가 삽화를 그린 영국 초판본을 번역한 이 원고는 한 작가의 숨은 노력과 열정을 생생하게 전한다. 이밖에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예술가들의 필적은 그들의 예술세계와 삶의 고민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전시 관계자는 "예술가들의 자필 원고는 단순히 기록적 가치를 넘어선다"며 "한 사람이 예술가로서 걸어온 발자취와 정신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 공간에서 관람객들이 진정한 내면의 풍경을 마주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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