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석의 발견과 되새김] 시 쓰기, 또는 無用論의 힘

  •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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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9-16 06:00  |  발행일 2025-09-15
이하석 시인

이하석 시인

#만다라


골동품 가게들이 늘어선 역 근처 지하도를 지나다가 만다라 그림의 액자가 길가에 놓여 있는 걸 본다. 인쇄된 것인가 싶어 자세히 살피니, 손수 그린 것이다. 티베트나 동남아 불교 국가에서 흘러들어온 듯하다. 액자값도 안 되는 값으로 가져가란다. 거의 공짜인 셈이라, 나는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어주고는 냉큼 들고 나온다.


그 만다라는 푸른 바탕에 중첩된 원형으로 가를 두르고, 그 안에 사각형을 또한 중첩 배치한 기하학적인 그림인데, 사각형 안에는 또 사각형이 들어 있다. 탑들이 바깥 사각의 네 변에 배치되어 원을 떠받치고 있는 구도가 조밀하고 정교하다. 색은 우리의 오방색을 적절하게 섞어놓은 듯하면서도 현란함을 자아낸다. 서재의 벽에다 걸어놓고, 그 앞에서 명상의 자세를 취해본다. 한 시인이 인도 여행에서 가져왔다며 내게 선물한 자그마한 불상을 그 앞에 놓고, 선정 자세를 흉내 내기도 한다.


티베트 여행 다큐멘터리에는 색색의 모래로 만다라를 만드는 광경이 더러 보인다. 모래라는 점성이 없는 마른 가루를 손으로 조금씩 쏟아서 색색의 모양을 만들어내는 게 아주 경건하면서도 장엄하다. 놀라운 광경은, 온 정성을 다해 만든 만다라를 의식이 끝나자 바로 손으로 쓸어버리는 것이다. 미국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도 만다라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백악관에 초청된 티베트 승려들이 만다라를 완성한 후 바로 쓸어서 파괴하는 데에 대한 당혹감과 감동을 보여준다.


만다라는 다양하게 제작된다. 색 모래로 만드는 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진흙이나 금속을 사용하여 입체로 만들기도 하고, 비단이나 종이 위에 회화로 그리기도 한다. 깊은 명상의 상태에서 선정(禪定)의 한 표현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이중 첫 번째는 만다라의 원래 규칙에 따라 만들어 사용한 뒤 파괴된다. 때로는 만다라를 회화의 한 양식으로 봐서 불단에 걸어두고 명상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단다. 내가 산 만다라 그림은 그런 형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만다라를 파괴하는 이유는 여러 설이 있지만, 소박하게 받아들여도 엄청나게 교훈적이다. 이를 문학 하는 일에 적용하여 이른바 문학의 무용성 이론과 연관 지을 수도 있겠다 싶다. 어쨌든 나는 만다라를 통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덧없으며, 그러므로 그런 데 현혹되지 말라'는 교훈으로 되새긴다.


#글 농사의 힘


글 농사가 만다라 사상으로 지탱되기도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필자가 등단한 지 50년을 훌쩍 넘어섰지만, 돌아보니, 주위에 그 이상의 연륜을 가진 선배 문인들이 적지 않다. 언어로 현실을 드러내고 끊임없이 자신을 개진하면서 여전히 그 민감성을 잃지 않는 늙은 문인들을 보는 건 사뭇 장엄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아는 한 문인은 등단 50년을 넘어서니 차츰 잡지의 원고 청탁이 줄어든다고 아쉬워한다.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 상황 때문이지만, 우리 문학의 중심적인 흐름에서 비켜난 게 아닌지 우려하며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그 자신은 물론, 원로 문인들이 여전히 시작에 몰두하면서 평생 다듬어온 언어의 결을 흩트리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원로 시인들의 '늙지 않은 시집' 출간은 그런 점에서 경이롭다. 80이 훨씬 넘은 한 선배는 '언어가 탱탱한' 시집을 내고 나서, "이 시들을 어떻게 썼습니까?"라는 후배의 물음에 "죽을 힘을 다해서 썼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시 쓰는 일을 통해 우리 문학의 한 '세계'를 이루는 일이기에 적당히 타협할 수 없으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80이 훨씬 넘은 한 선배가 최근 낸 시집을 부치겠다며 주소를 불러달라고 전화했다. 그러면서 슬쩍 "달천이 어디냐?"고 물었다. 얼마 전 한 시인의 시집 표4에서 충북 괴산의 달천에 대해 쓴 적이 있는데, 그 시집을 읽었다며 그 강의 이름을 묻는 것이다. 내심 놀랐다. 그는 여행을 좋아하고, 그 힘으로 글을 써온 시인인데, 몸이 성치 않은 상태에서도 처음 듣는 지명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곳에 가보려고 몸이 달아오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라면 그의 시는 여전히 예전처럼, 또는 그보다 못지않게 젊을 것이다.


그래, 문학 하는 일은 문단이나 주변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일이긴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결국은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과 믿음으로 자신의 '세계'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걸 지탱하는 게 새삼 '문학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기본적인 질문의 힘이며, 동시에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그 효용성을 의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무용성의 자각이 글을 쓰는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세계'의 진실을 위해


몸과 정신의 집중이 끝까지 유지되어 만다라가 완성되듯, 자신의 문학이 완성되기까지 온몸과 정신으로 밀고 나가는 열정이 늙은 문인들을 다잡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한다. 그러면서 완성과 동시에 파괴해버리는 만다라 미학이 그의 문학을 떠받치고 있어서 그 온전한 '내려놓음'을 통해 더욱 확실한 '세계'가 성취됨을 잊지 않는다.


기실 문학의 완성의 순간은 끝내 오지 않는다. 다만 그 순간을 꿈꾸면서 자신의 세계를 가다듬어 갈 뿐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죽음이 올 때야말로 자신의 문학을 놓는 순간이며, 자신의 만다라를 쓸어버리는 순간이기를 바라는 것이리라. 그런 마음이기에 그런 지극한 자세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찬란하고 완전한 만다라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을 뿐이다. AI가 판치는 시대에도 "한편에는 단어 하나 문장 표현 하나 찾느라 혹독한 산고를 겪은 끝에 생명체처럼 세상에 나온 인간 작가의 창작물"(윤흥길)에 대한 자부심으로 자신의 온 삶을 가누는 원로들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는 데서 우리는 효용성으로만 따질 수 없는, 예술이 갖는 '세계의 진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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