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왼쪽은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왼쪽은 함경북도 남양시이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도문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승첩 기념비. 지금은 중국 공안이 한국관광객의 출입을 막고 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시인 생가 입구에 '중국 조선족 유명시인 생가'라고 적혀 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용정에 있는 15만원 탈취 의거비. 비석 받침대가 허물어지는 등 관리가 소홀하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윤동주 시인 기념관에 있는 시인의 약력 소개 안내판. 누군가가 중국의 '중'을 지워버렸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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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으로 멈췄던 중국과의 교류가 다시 활발해진 가운데, 최근 만주 땅을 다시 밟았다. 6년 만이다. 2005년~2006년 1년간 이곳에 머무른 이후 거의 매년 이 지역을 찾았지만 코로나가 발목을 잡았다. 그사이 200만 중국동포의 심장부이자 북간도로 불리던 연변조선족자치주(이하 연변)는 어떻게 변했을까. 동북공정은 여전히 진행 중일까. 그리고 조·중 국경 상황은 어떨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연길공항은 20년 전이나 그대로였다. 8월 말부터 11월까지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하는 바람에 폐쇄된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도착해 운이 좋았다. 그렇지 않으면 선양이나 창춘을 경유하는 불편을 겪었을 것이다. 예전엔 창춘이나 선양에서 연길을 가려면 야간 열차를 타고 6~8시간을 갔다. 하지만 지금은 고속열차(高铁)가 생겨 이를 이용하면 각 2시간 30분, 3시간 4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연길 공항을 벗어나 북한과의 변경도시 도문으로 향했다. 연길을 남북으로 가르는 부르하통하는 그대로인데, 강변 양안에는 새로 지은 아파트와 호텔 등 고층빌딩이 줄지어 들어섰다. 연길시청사 등 주요 관공서도 하북에서 하남으로 옮긴 것 같다. 조양천을 빠져나와 교차로에 들어서니 동서남북 10차로가 맞이한다. 예전엔 연길 시내를 지나서 도문으로 갔는데, 넓은 우회도로가 생겼다. 언덕 위에는 고급 주택이 즐비하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이를 두고 한 말인 듯,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연길이 급격히 변화된 모습이다. 연길시 인구도 20년 전에 비해 20만명이 늘어나 60만명이다. 그나마 변하지 않은 건 한글 간판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선 소수민족 언어인 한글을 한자와 함께 병기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정든 연길 서시장과 신화서점을 들르지 못내 아쉽다. 중국 대부분의 대도시는 야관 경관에 공을 들이는데, 연길도 예전보다 밤이 훨씬 더 화려하겠지.
도문 시내로 진입하기 전 봉오수고(水庫)를 찾았다. 수고 초입에 대일항쟁기 홍범도 장군이 이끈 독립군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봉오동 승첩비를 보러 가기 위해서다. 수고는 '물을 가둬 보관하는 창고'란 의미로 댐과 같은데, 관리소 직원이 길을 막고 진입을 불허한다. 굳이 한국 관광객에 승첩비를 공개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도 왜 그럴까. 예전엔 이곳에 가서 묵념을 하며 독립군의 넋을 기린 적도 있다. 2005년 가을엔 댐 주변 오솔길을 따라 등산도 했다. 이 승첩비는 1989년 도문시인민정부가 이곳을 문물중점단위로 지정하면서 건립했다. 중국 땅에서 한민족의 '역사'라는 단어만 나와도 경기를 하는 중국답지 않은 소심함을 절감했다. 국내에서도 육사 내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려 한 그릇된 시도도 있었으니 유구무언이다.
도문은 두만강 하류지역으로 한반도 지도상 맨 꼭대기에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와 북한 남양시를 가로지르는 두만강은 10여년 전보다 강폭이 넓어지고 깨끗해졌다. 북한의 무산철광과 연변 용정의 종이공장 등을 지나면서 생활폐수와 섞여 강은 푸른 물이 아니라 황톳물이 돼버렸는데, 정수시설을 보강했한 것 같다. 강에서 보트나 뗏목을 탈 수 있는 건 그대로다. 하지만 전에 없던 '일광산삼림공원'이란 관광코스가 도문해관 교두국문 옆에 조성됐다. 공원 입구는 중국의 옛 성(城)을 본떠 관문을 만들었다. 남양시를 조망하기 좋은 일광산 언덕에 데크 계단과 남양정이란 전망대를 설치했다. 북한과 러시아산 잡화와 식료품, 커피를 파는 가게도 있어 한·중관광객으로 넘쳐난다. 남양정에 오르면 교두국문 옥상에서 보던 풍경보다 더 뚜렷하고 넓게 북한의 산하를 바라볼 수 있다.도문해관은 열 번도 더 왔을 것이다. 연길과 가까운 데다 두만강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맞은편 북한 함경북도 남양시는 예전보다 가옥과 건물이 훨씬 늘어났다. 낡은 기와집 대신 파란색, 주황색 슬레이트 지붕의 단층집이 많이 보이고 신축 아파트도 눈에 띈다. 하지만 초록이 무성해야 할 여름인데도 산은 벌거숭이다. 멀리 보이는 길도 좁다. 강변은 돌망태 옹벽으로 정비됐는데, 철조망은 더 높아지고 늘어났다. 언덕 아래에서 중국 측 노동자가 철조망 보강을 하고 있다. 일행 중 남양이 고향인 듯한 한 한국관광객이 "이렇게 먼 길을 돌아서 왔는데 갈 수 없다니..., 동생 세 명이 아직 저기에서 살아요"라면서 눈시울을 붉힌다. 남양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해주었다.
도문을 떠나 용정으로 향했다. 용정은 연변 내 도시(연길·화룡·도문·훈춘·돈화시·안도현·왕청현)중 조선족동포 집거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 2000년대 중반엔 60% 정도였는데, 지금은 줄어들었을 것이다. 용정에는 일송정, 해란강, 서전서숙 옛터, 대성중학교, 3·13반일의사릉, 15만원 탈취 의거 유적지, 간도주재 일본군총사령부, 연변 초대 주장 주덕해 생가, 명동촌 등 밟는 곳마다 항일 유적지다. 또한 용정은 민족 3대 시인 중 한 명인 윤동주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동주'에서 시인의 영원한 벗이자 사촌형이던 독립운동가 송몽규가 윤동주 덕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시인과 동갑으로 대학까지 줄곧 같은 학교를 나와 같은 해 광복을 6개월 앞두고 일본에서 옥사했다.
두 독립운동가의 생가는 명동촌에 있다. 윤동주 생가는 원래 방만 열 칸이 넘는 기와집이었으나 허물어지고 기와집 한 채와 별채만 남았는데, 지금은 윤동주 시인 기념관이 들어섰다. 기념관 주변엔 그의 시를 돌에 새겨 전시해 놓았다. 이웃집 송몽규의 생가는 한 개인이 매입해 깨끗하게 단장했다. 윤동주 생가 입구엔 한자로 '중국 조선족 저명 시인 윤동주', 한글로 '중국 조선족 유명 시인 윤동주'라고 씌여 있다. 2012년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가 윤동주 생가를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라고 한 것을 한국 언론에서 "윤동주가 어떻게 중국 국적이며 조선족인가" 라고 비판해서 그런지 '애국' 대신 '유명'으로 수정했다. 다만 '중국 조선족'이란 용어는 그대로 둬 논란이 되고 있다.
윤동주는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인데, 중국이 조선족으로 그를 가두려는 의도는 조선족 동포의 민족의식 발로를 경계하기 때문이리라. 한국 관광객의 백두산 관광 필수코스인 명동촌 입구엔 전에 없던 소공원과 시인의 길을 조성하고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상징화한 조각품들을 전시했다. 더 가관인 건 중국 공안이 윤동주와 송몽규가 함께 잠들어 있는 용정 인근 동산공동묘지의 출입을 금지했다. 6년 전까지만 해도 묘소 앞에서 참배를 했다. '시인 윤동주의 묘' 바로 옆에 '청년문사 송몽규의 묘'라고 비문이 씌여있었는데, 거기에도 '중국 조선족'을 갖다붙이려고 그런걸까.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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