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 12] 독립투사 DNA 물려받은 이정호··· 항일조직 실무간부로 활약

  • 조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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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2-02 15:23  |  발행일 2025-12-02

아버지 따라간 중국서 독립운동에 투신

조선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 등서 활약

행진곡 작사·작곡 등 선전 활동서도 두각

6·25전쟁 이후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다

퇴임 뒤 자녀 따라 美로 이주 1990년 별세


중국에서 조선의용대·한국광복군 등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정호 지사. 나무위키

중국에서 조선의용대·한국광복군 등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정호 지사. 나무위키

광복 80주년을 맞아 영남일보는 올해 매달 '내 이름은 투사' 시리즈를 통해 대구를 빛낸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 있다. 12월의 인물은 중국 현지에서 폭넓게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진 이정호(李貞浩, 1913~1990) 선생이다.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조직을 지속시키는 핵심 실무자, 조직의 목소리를 글을 통해 전파하는 필자로서 독립에 큰 힘을 보탰다.


◆ 父 따라간 중국서 독립운동 기반 다져


독립운동가 이정호 지사의 생가인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 668번지. 영남일보db

독립운동가 이정호 지사의 생가인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 668번지. 영남일보db

이정호는 옛 경북 달성군 화원면 능곡동에서 부친 이두산과 모친 정선이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날 무렵, 이정호의 부친은 사립 계성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1915년 졸업 뒤 숭실전문학교 진학을 위해 집을 떠났다. 1917년 9월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들 부자가 다시 만난 것은 훗날 이두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달성·경주·성주 3개 군 공채모집위원이자, 경북교통사무 특파원으로 임명돼 1920년 8월 귀국했을 때였다. 당시 이정호는 밀양의 집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이두산은 신분을 숨기고 집성학교에 교원으로 잠입, 특파원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이두산은 어린 아들 이정호와 함께 다시 중국행을 결심했다.


이들 부자는 1920년대 후반 상하이를 떠나 1928년 무렵 복건성 하문(厦門)으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정호는 하문지역에서 3년간 학업에 매진하며 기반을 다졌다. 1930년 7월엔 하문대학 문학원 교육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정호는 이듬해 새로운 길을 택한다. '피압박 약소민족 학생을 우대한다'는 소식을 듣고 1931년 1월 중국 광저우의 중산대학 2학년으로 전학한 것. 중산대학 시절 이정호는 부친이 몸담았던 한국독립당 광동지부 기관지 '한성(韓聲)'에 글을 기고했다. 이후 점차 독립운동의 언저리로 조금씩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그는 학생 신분이었고 본격적인 항일 활동은 시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쓴 글 대부분은 일제 침략을 고발하거나 한국 독립 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청년 이정호의 시선이 이미 중국 유학 시절부터 '조국 독립'이라는 문제의식에 깊게 닿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항일조직의 실무 중심에 서다


조선의용군 행진곡의 악보. 이정호 지사가 작사·작곡하였다. 음정을 숫자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독립기념관 제공

조선의용군 행진곡의 악보. 이정호 지사가 작사·작곡하였다. 음정을 숫자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독립기념관 제공

1942년 10월25일 중국 충칭에서 제34회 임시의정원회의를 마친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노란색 동그라미로 표시한 인물이 이정호 지사다. 영남일보db

1942년 10월25일 중국 충칭에서 제34회 임시의정원회의를 마친 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노란색 동그라미로 표시한 인물이 이정호 지사다. 영남일보db

미군정 시절 이정호 선생이 군정장관 비서실장으로 재직할 때 책상 위에 두었던 명패. 독자 제공

미군정 시절 이정호 선생이 군정장관 비서실장으로 재직할 때 책상 위에 두었던 명패. 독자 제공

1934년 중산대학을 졸업한 이정호는 이듬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 조직부장과 화남지부장으로 활동했다. 3년 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한인 청년들이 잇달아 휴학계를 내고 항일투쟁 참여를 선언했다. 이정호도 7년 가까운 광저우 생활을 접고, 이들과 함께 전선으로 향했다. 광저우를 떠난 것은 학생·유학생의 삶을 뒤로하고 본격적인 무장·실무·선전 투쟁의 세계로 들어서는 전환점이었다.


난징으로 이동한 그는 1937년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星子)분교에서 학생 겸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1939년 그는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이 창설한 항일무장조직 '조선의용대'에 입대했다. 1940년 2월 조사주임을 맡았고 1941년 5월엔 제1지대 제1전구사령부 소속으로 활동했다.


특히, 그는 조선의용대통신에 총 11편의 글을 게재하는 등 논객으로 활약했다. 문필·선전활동에서 큰 두각을 보였다. 1940년 봄 의용대 일부가 뤄양(洛陽)으로 북상할 땐 '조선의용대 행진곡'을 직접 작사·작곡해 대원들의 사기진작에 앞장섰다.


1942년 의용대가 한국광복군과 혼합 편성되면서 그는 광복군 제1지대 본부 정훈조(政訓組)에 편입돼 상위(上尉)로 복무했다. 같은 해 10월 보궐선거에서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며 제34회 임시의정원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그는 임시정부 핵심 부처인 외무부에서 1943년 3월 총무과장을 맡았다. 1944년 6월 엔 정보과장으로 임명됐다. 외무부가 총무·외사·정보 3과 체계로 운영된 점을 감안하면, 당시 이정호는 외무부 실무를 실질적으로 이끈 중견 간부로 평가된다.


일제 패망 후인 1946년 3월 귀국한 이정호는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정부수립, 6·25전쟁을 거치면서 다양한 변화를 겪는다. 미군정 시기(1945년9월9일~1948년 8월15일)에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아서 러취(Archer L. Lerch) 미군정장관과 뒤를 이은 윌리엄 딘(William F. Dean) 군정장관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11월엔 총무처 상훈국장으로 임명됐다. 6·25전쟁 이후 그는 정치·행정 일선에서 물러나 학계로 향했다. 청구대학과 대구대를 거쳐 영남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1980년 정년퇴임 뒤엔 자녀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고, 1990년 7월1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가데나에서 별세했다. 정부는 2009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해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했다.


◆ 대구 최초 부부 독립유공자 탄생


이정호 선생의 차남 이지웅(오른쪽) 전 건설협회 대구지회장과 손자 이석우 삼진씨앤씨 대표가 각각 이정호·한태은 지사의 훈장을 든 채 활짝 웃고 있다.  영남일보db

이정호 선생의 차남 이지웅(오른쪽) 전 건설협회 대구지회장과 손자 이석우 삼진씨앤씨 대표가 각각 이정호·한태은 지사의 훈장을 든 채 활짝 웃고 있다. 영남일보db

이정호·한태은 부부는 슬하에 4남1녀를 뒀다. 사진은 셋째딸 이혜란(80) 씨의 결혼식 모습으로,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이가 이정호 선생이다. 독자 제공

이정호·한태은 부부는 슬하에 4남1녀를 뒀다. 사진은 셋째딸 이혜란(80) 씨의 결혼식 모습으로,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이가 이정호 선생이다. 독자 제공

정부는 이정호의 공적을 기려 1982년엔 건국포장을, 1990년 엔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그의 아내 한태은 지사 역시 충칭에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으로 활동했고, 이후 광복군 제1지대 대원으로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한 지사 역시 202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은 대구 최초의 부부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정호·한태은 부부는 슬하에 4남1녀를 뒀다. 이 선생은 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도 자식들에겐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셋째딸 이혜란(80)씨는 "부친은 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지만 집에선 누구보다 따뜻한 아버지였다"고 말했다. 그는 "집에 계실때 책을 안보시면 깡통을 가지고 배나 비행기를 손수 만들어 주시곤 했다"며 "겨울철엔 썰매도 만들어 줄 만큼 세심하고 다정한 분이었다"고 아버지를 회상했다.


이정호의 독립운동 여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첫 출발점은 부친 이두산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항일 활동에 뛰어든 뒤부터 점차 부친의 그늘을 벗어나 스스로의 독립운동 경로를 개척해 갔다. 영어실력이 뛰어나 충칭의 미군 정보·선전기관인 OWI 중국지부에서 일할 땐, 한글 삐라 작성 등 대일 심리전·선전전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정호는 조직을 이끄는 '카리스마형 지도자'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고학력과 풍부한 실무 경험을 앞세워 조직 내에서 신임이 두터웠다. 그래서일까. 30대 초반에 이미 소장급 중간간부로 자리잡았다. 조선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임시정부 등 여러 조직에서 안정적인 실무를 책임지는 중간간부로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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