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도 없이 작업에만 몰두…작가에 중요한 건 창의성‧진정성”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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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2-23 18:21  |  발행일 2025-12-23
▮출향인사를 찾아서/ 대구 출신의 구자현 화가
세계적 명품 주얼리와 협업
MZ애호가들로 전시장 북적
세밀한 묘사 ‘템페라’ 기법
초집중 몰입과 정교함 요구
대구 출신의 구자현 작가가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예술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은경 기자

대구 출신의 구자현 작가가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예술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은경 기자

대구 출신의 구자현 작가가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예술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은경 기자

대구 출신의 구자현 작가가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예술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은경 기자

국내 최대 아트페어인 키아프가 지난 9월 성황리에 열렸다. 올해 축제는 20여개국 175개 갤러리가 참여했는데, 그 중에서도 서울 강남구 청담동 김리아 갤러리는 전국서 몰린 MZ들로 행사 기간 내내 북새통을 이뤘다. 세계적 명품 기업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소속 하이주얼리 브랜드 '레포시'와 대구 출신의 화가 구자현의 협업이 젊은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은 것이다. 구 화가는 "서로 다른 매체와 장르가 만나 색다른 공명을 이루는 흔치 않은 전시회였다. 회화와 주얼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빚어내는 미묘한 울림과 조화, 이를 통해 동시대 예술의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가 된 것"이라고 밝혔다.


◆시간과 인내로 빚은 예술 '템페라'


구 작가는 회화의 다양한 기법 중에서 '템페라'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같은 방식의 작업을 고수하는 작가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다. 템페라는 유화나 아크릴화가 대중화 되기 이전인 12~15세기, 중세 유럽의 종교화 등에서 주로 사용된 전통 회화 방식이다. 투명한 레이어를 반복해 채색하는데, 세밀한 묘사력과 정밀한 선 표현이 가능한 반면 수정이 어려워 숙련된 기술이 필수적이다.


그가 캔버스에서 주로 사용하는 재료는 화폐와 장신구 등으로 이용되는 '금'이다. 두께가 0.001mm 안팎의 아주 얇은 금박을 캔버스에 펼쳐 형상화한다. 고도의 몰입과 정교함을 요구하는 작업은 약간의 정전기나 바람만 불어도 와르르 무너져 버릴 수 있어 조심스럽다. 홍가이 미술평론가는 구 작가의 작업을 두고 "노동의 신성함이 스며 있는 수행의 결과물"이라고 정의 내린다.


초집중 상태에서 몇 시간을 홀로 작업하고 나면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 그대로 뻗어버리기 일쑤다. 홀로 말 한 마디 없이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작업을 해나가는 그의 모습은 차라리 수행자에 가깝다.


구자현 작가가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김은경 기자

구자현 작가가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김은경 기자

대구 출신의 구자현 작가가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예술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은경 기자

대구 출신의 구자현 작가가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예술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은경 기자

◆안료 직접 만들고, 종이 특허내 제작


작품의 90%는 바탕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그는 작업의 전 과정에서 한치도 소홀하지 않는다. 평소 온화하고, 너그럽지만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조금의 빈틈, 타협도 허용하지 않는 철두철미함을 발휘한다. 작은 부분, 사소한 것 하나도 설렁설렁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첸니노 첸니니의 회화 공정서 '회화술의 서'를 번역 출간할 만큼 전통적 제작 방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재료를 스스로 정제하고 실험하며 만들어내는 모든 과정을 예술로 여긴다.


검은색 캔버스를 만드는 과정부터 지난한 작업이다. 먼저 송연(松煙) 먹을 조각내서 여러 날 물에 불린다. 그것이 녹아 죽처럼 흐물흐물해졌을 때 믹서에 넣고 간다. 이를 다시 고운 천에 받쳐내어 정결한 묵액(墨液)을 얻는다. 그렇게 얻은 먹물을 한지나 천에 스며들게 해 완벽한 먹빛을 찾아가는 것이다.


제작 과정에 공을 들이는 것에서 나아가 재료에 들어가는 돈을 아끼지 않는 것 역시 그가 수십년 동안 고수해온 원칙이다. 무엇보다 종이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라고 믿는 그는 좋은 종이를 찾아 영국, 프랑스, 일본 등 가리지 않고 몇 개월씩 발품을 팔아 찾아가 구해왔다. "한국에서 저 만큼 종이를 쓴 사람도 드물 거에요. 질 좋은 종이가 있다고 하면 전국 어디든 찾아가고, 모아두었죠. 그렇게 몇 년을 하고 나니 국내 종이공장, 소문난 지장은 거의 다 만나 본 것 같아요. 종이로 특허까지 내게 되었죠."


◆스마트폰도 없이 작업에만 몰두


대구 출생인 작가는 어렸을 적 섬유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성장했다. 화려한 패턴의 섬유작업물을 보면서 작가의 꿈이 싹텄을 지도 모를 일이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대학과 교토 세이카대학에서 회화와 판화를 전공했다.


"제가 갔을 때 일본이 최고로 잘 나가던 시절이었어요. 미국보다 학비가 더 비쌌으니까요. 집안의 가세가 기울고 어려운 속에서 유학을 떠났는데, 힘들긴 했지만 판화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돌아올 수 있었죠."


1980년대 말 귀국 후 판화와 회화작업으로 눈에 띄는 활동을 했다. 2002년 공간 국제판화비엔날레전 대상, 1998년 삿포로 국제현대판화비엔날레전 스폰서상, Frechen(서독국제판화비엔날레전) 등 20여 회 수상했다.


작가의 길을 걸은 지 어느덧 40여년, 그는 지금도 초심을 꼿꼿이 유지하고 있다. 전국민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다는 스마트폰도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살림집과 연결되어 있는 작업실로 출근한다. 문명의 이기라고는 오로지 클래식 FM이 유일하다. 그곳에서 하루종일 그림과 사람, 예술과 인생을 화두삼아 작업에 몰두한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창의성, 진정성


2025년 현재 K-pop과 OTT 콘텐츠를 필두로 한 K-컬처는 전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순수예술에 종사하는 예술인들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은 현실이다. 상업성과 대중성의 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가운데 순수예술의 설 자리는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구 작가는 한국 미술시장의 왜곡된 구조에 대해서 한마디 했다.


"예술은 지난 수세기 동안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왔습니다. 그만큼 예술이 인류의 삶과 정서에 미친 영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현대미술이 뭘까요? 단순히 요즘 만들어진 작품을 일컫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형식, 태도, 문제의식이 동반되지 않으면 현대미술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성, 진정성입니다."


예술시장의 활성화 및 작가들이 보다 안정적으로 작품활동을 이어가게 하기 위한 제안도 내놓았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작가는 작품에만 전념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전시 기획과 작품 운송, 홍보와 평론의뢰까지 전 과정을 작가가 책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할분담을 통해 작가의 어깨를 좀 더 가볍게 해주어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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