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Sarajevo) <상>

  •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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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1-09 06:00  |  발행일 2026-01-07
모스타르에서 사라예보로 가는 길. 네레트바강을 따라 산악도로가 이어져 있다.

모스타르에서 사라예보로 가는 길. 네레트바강을 따라 산악도로가 이어져 있다.

'사라예보, 이에리사, 탁구 세계제패'. 1973년이었으니,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보다. 라디오에서 쉼 없이 흘러나왔던 내 어린 시절 '국뽕'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도시이다. 1990년대 사라예보는 '보스니아 내전'의 전장으로 각인되었다. 20년의 간극만큼 너무 다른 나의 사라예보는 얼굴도 잊어버린 첫사랑처럼 아련하다. 이제 그곳으로 간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대표적 관광 도시인 모스타르에서 종일 굵은 비를 맞았다. 사라예보로 떠나는 날 아침, 그 비는 진눈깨비로 변했다. 11월에 맞는 이른 눈은 상상 속의 연인을 만나기 좋은 배경이었다. 자동차로 2시간이면 닿을 거리이다. 산과 산 사이로 구비치는 네레트바강을 끼고 물결처럼 함께 흐른다. 강과 나란한 도로는 끊임없이 변주되는 낯선 풍경으로 시선을 빼앗는다. 산길로 접어들자 진눈깨비는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온 세상이 하얘지는데 눈송이를 받아먹은 강은 더욱 푸르렀다. 자동차는 느려졌고, 신경이 조금씩 운전으로 옮겨갔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나타났다. 눈발도 더욱 거세졌다. 뒤따라갈 앞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120㎞ 남짓한 거리를 3시간 너머 달렸다.


숙소 주인은 골목 어귀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길가 주차 자리를 안내하고, 열쇠 꾸러미를 건네준다. 짐을 풀려고 옷장을 열자 옷들이 가득하다. 살던 집을 렌트한 것이다. 화장실에도 사용 흔적이 있는 샴푸와 면도기, 비누 등을 한켠에 가지런히 밀어놓았다. 남동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흔히 경험하는 숙소이다. 생활 내음은 낯선 도시의 긴장을 풀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라예보 도시 전경. 사진은 국립 대학도서관 전시실의 홍보사진을 재촬영한 것.

사라예보 도시 전경. 사진은 국립 대학도서관 전시실의 홍보사진을 재촬영한 것.

사라예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다. 남유럽 발칸반도에 위치한 이 나라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라는 두 지역의 지명을 합쳐서 국명으로 삼았다. 과거 체코 슬로바키아와 같은 방식이다. 인구는 부산보다 적은 343만여명(2022)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치 체제는 복잡한 연방 공화국 형태이다.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이 중심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세르비아인이 중심인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구성된 1국가 2체제이다. 연방은 지역으로, 공화국은 민족과 종교를 중심으로 구성된 셈인데, 전자는 내각제이고 후자는 대통령제이다. 사라예보는 수도답게 연방과 공화국의 경계선에 위치해 있다. 1461년 오스만제국이 건설한 이 도시는 17세기 중반까지 발칸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도시 이름은 '궁궐'이라는 뜻의 튀르키에어 '사라이'에서 유래했다. 정확한 인구 통계를 찾기 힘들지만 대략 40만명 전후로 추정한다. 사라예보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주택가도 언덕에 형성되어 있어, 골목길에서도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이런 지형 때문에 내전 중에는 도시 전체가 봉쇄되기도 했다. 도심의 고지대를 점령한 반군들은 많지 않은 병력으로도 효과적으로 도시를 포위할 수 있었고, 저격수들을 포진시켜 도심을 장악했다.


민족 구성이 복잡하고 종교가 다양했던 유고슬라비아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보스니아는 늘 긴장이 멈추지 않았다. 1992년 2월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계는 자신만의 군대를 조직했고,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아 보스니아 동부를 장악했다. 그리고 '사라예보 포위전'과 '스레브레니차 학살'로 대표되는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순식간에 보스니아는 발칸의 킬링필드가 되었고, 그 수는 현재까지 확인된 9천명을 포함 약 3만명으로 추정된다. 이 학살은 특정 인종이나 종교 등을 말살하고자 하는 제노사이드였다. 세르비아계 반군은 '인종정화'를 한다며 보스니아 여인들을 강간하고 낙태도 하지 못하게 구금하여 출산을 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수만 명이라고 한다. 내전 후에 처벌받은 가해자는 극소수였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채 어머니를 숨기며 살아가야 했다. 지금 그 아이들은 30대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 '그르바비차'(2006)는 그 아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깨닫게 되면서 갈등하고 좌절하고 화해하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내전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생채기가 깊어 보인다.


국립 대학도서관 전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인 1896년에 시청으로 건설됐고, 1946년부터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국립 대학도서관 전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인 1896년에 시청으로 건설됐고, 1946년부터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국립 대학도서관'은 사라예보의 랜드마크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전의 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비예치니차로 불리는 이 건물은 원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인 1896년에 시청으로 건설됐고, 1946년부터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밀랴츠카 강변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건물 맞은편에는 이나트 쿠차(Inat Kuća)라는 건물이 있다. 도서관과 이 건물에 얽힌 일화도 재미있다. 이 건물은 원래 지금의 도서관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시청 건설을 위해 철거를 요청했지만 당시 집주인은 끝까지 거부하였고, 결국 벽돌 하나하나 분해하여 강 건너편으로 옮겨주는 조건으로 이주에 동의했다. 이 일화는 보스니아인의 고집과 불굴의 정신을 상징하게 되어 이후 '고집의 집'이라는 뜻의 '이나트 쿠차'로 불린단다. 1997년부터 이 건물은 보스니아 전통요리 레스토랑으로 탈바꿈하였다. 옆 공원에는 도서관을 배경으로 '#SARAJEVO' 입간판도 서 있어서 인증샷의 명소이기도 하다.


고집의 집 이나트 쿠차(가운데 건물). 오른쪽 다리가 16세기 오스만제국 시절에 건설되었다는 세헤르-체하야 석교이다.

'고집의 집' 이나트 쿠차(가운데 건물). 오른쪽 다리가 16세기 오스만제국 시절에 건설되었다는 세헤르-체하야 석교이다.

16세기 오스만제국 시절에 건설되었다는 세헤르-체하야 다리를 건너면 곧장 도서관이다. 황금색 바탕에 화려한 줄무늬가 인상적이었다. "1992년 8월25~26일 밤, 반인도적 범죄 및 국제법 위반을 저지른 세르비아 가해자들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립 대학도서관에 방화하여 200만 권 이상의 도서, 원고 및 기타 문화유산을 파괴했습니다. 기억하고, 경고하고, 규탄하십시오." 이 아름다운 건물 기둥에 적힌 명판의 경구이다. 담담하고 단호하다. 애써 아픔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12시간20분동안 지속된 화재로 300만건이 넘는 자료를 비롯해 장서의 약 90%가 파괴되었다. 200만권 이상의 책, 신문, 학술지 등이 화염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새까맣게 타버린 기억의 잔해는 문화 학살이자 도시 학살의 징표였다. 하지만 도서관은 시민들의 의지와 용기 덕분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예술가들로 구성된 의용소방대는 남아 있는 장서들을 법학부 지하 공간, 복권 판매점, 교외 핵 대피소 등으로 옮기고 복원작업을 시작했고, 18년이 지난 2014년에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살아남은 책들이 여전히 도서관으로 귀환하지 못했지만 이 공간은 전쟁의 비극을 증거하는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복원 과정에서 총알 자국과 불탄 흔적을 지우지 않고 역사의 증거로 삼았다.


국립 대학도서관 내부. 외관만큼 내부도 화려하다.

국립 대학도서관 내부. 외관만큼 내부도 화려하다.

외관만큼 내부도 화려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숙연했다. 버려진 아이, 무너진 건물, 불타는 다리 등 전시실에 걸린 참혹한 사진들은 실제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끔찍했다. 특히 지하전시실은 실제 흔적과 영상이라는 이질적 두 매개를 배합해 전쟁의 실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전시된 불탄 책은 왜 도서관까지 폭격했는지, 도대체 누구의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를 되묻는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폐허 위에서 공연된 실황 영상과 선율이었다. 공간 전체를 감싸는 모차르트의 진혼곡 '레퀴엠'은 역사를 파괴할 수는 있지만 결코 지울 수 없다는 항변 같았다. 내전이 한참이던 1994년 6월19일, 유명 지휘자 주빈 메타가 사라예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폐허가 된 이곳에서 공연한 실황이었다.


국립 대학도서관 지하전시실. 불탄 책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국립 대학도서관 지하전시실. 불탄 책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이러한 전장의 공연은 용기 있는 한 음악가로부터 시작됐다. 1992년 5월27일, 한 가게 앞에 많은 사람이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그 순간 포탄이 떨어져 2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에 분노와 슬픔을 느낀 한 사내가 다음날 포탄이 떨어졌던 오후 4시 그 장소에서 첼로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저격수에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는 도서관, 시장 등 포탄에 파괴된 폐허를 찾아다니며 희생자 수만큼 22일간이나 연주를 계속했다. 그 사내는 사라예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 첼리스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였다. 그 연주로 인해 잠시나마 총성이 멈추었다. 당시 그가 연주했던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는 지금도 평화를 염원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이 일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었다. 밥 딜런의 연인으로도 유명한 미국의 반전가수 존 바에즈는 이듬해 사라예보를 방문해 그를 만났고, 방탄복을 입은 채 눈물을 흘리며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열창하였다. 영국의 작곡가 데이비드 와일드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라는 무반주 첼로 곡을 작곡했고, 캐나다 소설가 스티븐 갤러웨이는 동명의 소설을 발표했다. 사라예보의 비극 가운데 꽃핀 예술과 문학은 다시 인간에 대한 희망을 피우는 불씨였다.


사라예보 중심가 페르하디예 거리 끝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1946년에 세운 '불꽃 기념비'이다. 하지만 내전이 시작되면서 이 불꽃도 꺼져버렸다.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포위된 도시 속에서 더 이상 불꽃도 타오를 수 없었지만 예술과 문학이 지핀 인간 불씨는 꺼지지 않았던 것이다. 내전이 끝나 다시 타오르게 된 불꽃에는 내전 희생자의 영혼도 겹쳐 있다. 눈 내리는 거리 가운데 위태롭게 흔들리는 불꽃을 보면서 여전히 전쟁 중인 우리 인간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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