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주 새마을문고대구북구지회장
거대한 서사는 힘이 세다. 황석영의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를 만난 시간은 근현대사라는 험준한 산맥을 증기기관차에 실려 넘는 체험이었다. 구한말의 이백만에서 시작해 이일철과 이지산을 거쳐 마침내 45m 공장 굴뚝 위에 선 이진오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철도원 가족의 삶은 노동의 기록을 넘어 이 땅의 민초들이 시련을 견디며 생을 이어온 방식 자체를 장엄한 파노라마로 보여준다.
이 굵직한 서사 속에서 내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든 것은 거창한 이념이나 투쟁의 구호가 아니었다. 동료들의 죽음과 분신을 목격한 끝에 주인공이 내뱉는 현실적인 한마디였다. "살았으니까 꿈틀거려보는 거지."
이 짧은 문장은 증조부 때부터 이어져온 생명력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들에게 삶은 낭만이 아니라 기름밥을 먹고 무거운 쇳덩이를 굴려야 하는 고단한 노동이었고, 끝없이 이어지는 지속이었다. 소설은 말한다. 그 반복을 견디며 '오늘'을 살아내는 일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숭고함이라고. 삶은 비범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비루해 보이는 일상을 묵묵히 통과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얻는다고.
책을 덮으며 내가 발 딛고 선 현실을 돌아봤다. 나는 새마을문고 회장이자 지역 아이들을 위한 북구어린이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문을 열고 서가를 정돈하며 도서를 채워 넣고, 어린이집 아이들이 책과 친해질 수 있도록 체험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마주할 때면 이 일이 분명해지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한정된 예산과 인력, 반복되는 일정 속에서 무력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거대한 흐름 앞에서 도서관의 역할은 너무 미미한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안개처럼 밀려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소설의 문장이 다시 나를 붙든다. 무력감은 패배의 신호가 아니라 살아 있기에 가능한 고민의 증거인지도 모른다. 철도원 삼대가 멈추지 않고 기차 바퀴를 굴려 시간을 이어왔듯, 나 또한 도서관이라는 현장에서 문화의 바퀴를 굴리는 사람이다. 오늘 아이들에게 읽어준 동화 한 권, 준비한 프로그램 하나가 당장 성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듯 그 시간은 아이들의 내면을 살찌우고 지역을 조금씩 좋은 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삶이 팍팍하고 지루하게 느껴질수록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먼 미래의 막연한 행복이 아니라 오늘을 굳건히 살아내는 태도다. 반복되는 일상은 소진을 부르는 굴레만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뼈대가 되기도 한다. 오늘도 나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살아 있기에 꿈틀거리고, 그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 따뜻한 세상을 만든다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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