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길] 철도원 삼대

  • 정선주 새마을문고대구북구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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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1-16 06:00  |  발행일 2026-01-16
정선주 새마을문고대구북구지회장

정선주 새마을문고대구북구지회장

거대한 서사는 힘이 세다. 황석영의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를 만난 시간은 근현대사라는 험준한 산맥을 증기기관차에 실려 넘는 체험이었다. 구한말의 이백만에서 시작해 이일철과 이지산을 거쳐 마침내 45m 공장 굴뚝 위에 선 이진오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철도원 가족의 삶은 노동의 기록을 넘어 이 땅의 민초들이 시련을 견디며 생을 이어온 방식 자체를 장엄한 파노라마로 보여준다.


이 굵직한 서사 속에서 내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든 것은 거창한 이념이나 투쟁의 구호가 아니었다. 동료들의 죽음과 분신을 목격한 끝에 주인공이 내뱉는 현실적인 한마디였다. "살았으니까 꿈틀거려보는 거지."


이 짧은 문장은 증조부 때부터 이어져온 생명력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들에게 삶은 낭만이 아니라 기름밥을 먹고 무거운 쇳덩이를 굴려야 하는 고단한 노동이었고, 끝없이 이어지는 지속이었다. 소설은 말한다. 그 반복을 견디며 '오늘'을 살아내는 일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숭고함이라고. 삶은 비범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비루해 보이는 일상을 묵묵히 통과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얻는다고.


책을 덮으며 내가 발 딛고 선 현실을 돌아봤다. 나는 새마을문고 회장이자 지역 아이들을 위한 북구어린이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문을 열고 서가를 정돈하며 도서를 채워 넣고, 어린이집 아이들이 책과 친해질 수 있도록 체험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마주할 때면 이 일이 분명해지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한정된 예산과 인력, 반복되는 일정 속에서 무력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거대한 흐름 앞에서 도서관의 역할은 너무 미미한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안개처럼 밀려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소설의 문장이 다시 나를 붙든다. 무력감은 패배의 신호가 아니라 살아 있기에 가능한 고민의 증거인지도 모른다. 철도원 삼대가 멈추지 않고 기차 바퀴를 굴려 시간을 이어왔듯, 나 또한 도서관이라는 현장에서 문화의 바퀴를 굴리는 사람이다. 오늘 아이들에게 읽어준 동화 한 권, 준비한 프로그램 하나가 당장 성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듯 그 시간은 아이들의 내면을 살찌우고 지역을 조금씩 좋은 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삶이 팍팍하고 지루하게 느껴질수록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먼 미래의 막연한 행복이 아니라 오늘을 굳건히 살아내는 태도다. 반복되는 일상은 소진을 부르는 굴레만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뼈대가 되기도 한다. 오늘도 나는 도서관으로 향한다. 살아 있기에 꿈틀거리고, 그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 따뜻한 세상을 만든다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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