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르포-이장 선거로 멍드는 마을 공동체 (상)] 이장 선거 후 마을회관에 흐르는 침묵

  • 마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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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2-11 18:00  |  발행일 2026-02-11

선거 후 회관 발길 '뚝'… 마을 공동체 붕괴

칠곡군 왜관읍 전경.  칠곡군 제공

칠곡군 왜관읍 전경. 칠곡군 제공

경북 칠곡군의 한 농촌마을에서 만난 주민 박찬대씨(72·가명)는 "정월 대보름이면 다 함께 오곡밥 나눠 먹던 마을 공동체가 이장 선거 때문에 풍비박산 났다"고 토로했다. 마을 잔치가 되어야 할 이장 선거가 '총성 없는 전쟁'으로 변질되면서 공동체의 결속력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마을 단위까지 번지며 사회적 병폐가 된 '이장 선거'에 대해 상·하편으로 짚어본다.


11일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한 마을회관은 설 명절을 앞두고 있지만 조용하다. 인사를 건네자 한 어르신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요새는 말 안 하는 게 낫습니더. 괜히 한마디 했다가 편 가른다 소리 들으면, 그날로 마을에서 찍히는 기라예."


불과 1~2년 전만 해도 이곳 마을회관은 주민들로 북적였다. 농사 이야기, 자식 이야기, 동네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전 치러진 이장 선거 후 풍경은 달라졌다. 선거 결과를 둘러싼 불만이 쌓이면서 주민들이 둘로 갈린 것이다. 당선자 측 주민들은 마을회관에 나오고, 낙선자 측은 발길을 끊었다.


갈등은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농로 포장 순서나 배수로 정비 같은 사소한 사안에도 "왜 저 집부터 하느냐"는 말이 나온다. 주민 김모(72)씨는 "예전 같으면 웃고 넘길 일인데, 선거 이후 다르게 들린다"고 답답해 했다.


이 같은 현상은 경북지역 농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선 공무원들은 이장 선거 후 주민 간 갈등과 민원이 폭증한다고 입을 모은다. 칠곡군청의 한 공무원은 "선거가 끝난 뒤 특정 마을에서만 민원이 집중되는 경우가 있다"며 "대부분 선거 과정에서 생긴 감정의 골이 원인"이라고 했다.


과거 이장은 덕망 있는 어른을 추대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각종 행정 전달의 창구이자 보조사업 신청과 마을기금 관리, 개발사업 의견 수렴 과정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월 수당과 회의수당, 각종 혜택이 더해지면서 이장직은 '봉사'보다 '권한'의 성격이 강해졌다. 선거가 과열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칠곡군에는 총 214명의 이장이 있다. 선거 시기는 마을마다 다르다. 조례상 3년의 임기가 보장되고, 횟수 제한 없이 연임이 가능하다.


이장 선거 갈등은 농촌 마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도심지역도 이장 선거로 인한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다. 수백 세대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이장선거 공고를 본 주민은 손에 꼽힌다. 그만큼 형식적이고, 입주민 관심도 낮다. 선거 참여자가 소수에 그치지만 선출된 이장은 아파트 단지 대표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다수 입주민은 이장이 누구인지, 무슨 권한을 갖는지조차 모른다.


문제는 농촌 마을을 전제로 설계된 이장 제도가 공동주택 중심의 도시 생활 구조와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아파트 단지는 관리사무소와 입주자대표회의가 자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이장 제도를 얹다 보니 대표성·권한·책임 부분이 중복된다. 갈등도 불가피해진다. 왜관읍 A 아파트 관리소장은 "행정 전달 창구로서의 역할은 이해하지만 이장이 운영 사항까지 관여하면 혼란이 커진다"고 했다.


A아파트 동 대표를 맡고 있는 윤모(60)씨는 "아파트 단지의 경우 이장 선출 여부를 자율화하거나 입주자대표회의와 연계한 대체 행정 전달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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