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실 새마을문고 대구북구지부 이사
입춘이 지났지만 대구의 겨울바람은 여전히 매섭다.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문득 '언어'가 인간의 깊은 내면을 어디까지 담아낼 수 있을지 자문하게 된다. 그 물음은 상형문자 속에 깃든 수천 년의 비의(秘意)를 풀듯, 최근 우리 시대의 큰 성취로 기억되는 한강의 '검은 사슴'으로 나를 이끌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탐독한다. 나는 작가의 첫 장편인 이 작품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뜨겁고도 시린 질문을 마주했다. 소설 속 '검은 사슴'은 지하 세계에 살며 햇빛을 갈망하다 지상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태양을 마주하는 순간, 사슴의 눈은 녹아내리고 몸은 굳어버린다. 빛을 향한 갈망이 도리어 파멸이 되는 이 역설은 쉰의 고개를 넘고 있는 우리네 삶의 궤적과 닮았다. 그리고 그 역설은 결국 하나의 단어로 이어진다.
중국어에 '심연(深淵)'이라는 말이 있다. 깊고 소용돌이치는 물을 뜻하지만, 이 단어에서 타인의 고통을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을 읽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 잃어버린 기억과 상처라는 어두운 광산 속에 갇혀 있다. 작가는 그 어둠을 섣불리 걷어내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심연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 고통이 살이 되고 뼈가 되는 과정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기록한다.
우리는 젊은 날의 열망이 화려한 태양 아래서 녹아내리는 경험을 수차례 겪어왔다. 작가는 말한다. 비록 눈이 멀고 몸이 굳을지라도, 빛을 향해 고개를 들었던 그 순간의 의지 자체가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해 몸을 세우는 마음의 방향일지 모른다. 그 방향을 익히는 곳이 내게는 도서관이다.
나는 새마을문고 이사로서 지역의 작은 도서관들이 우리 이웃들에게 어떤 공간이 되어야 할지 늘 고민한다. 도서관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검은 사슴'을 마주할 용기를 얻는 곳, 그리고 타인의 심연에 공감하는 법을 배우는 자리여야 한다. 도심 속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서로의 어둠에 등불을 비추어 주는 다정한 연대와 같다. 말로 다 담기지 않는 마음을 문장이 대신 건네는 순간들이 그곳에 쌓인다.
'검은 사슴'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다시 교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가르칠 문장을 고른다. 차가운 잉크로 쓰인 문장이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따뜻한 온기로 피어나길 바란다. 삶이라는 거대한 광산에서 길을 잃었다면, 이 책이 전하는 '아픈 아름다움'에 몸을 기대어 보길 바란다. 심연의 끝에서 길어 올린 그 빛이야말로 우리가 책 속에서 찾아내야 할 가장 귀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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