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옥 수필가·대구문인협회 부회장
썸은 영어의 썸싱(something)에서 나온 말이다. 남녀 간의 묘한 기류를 일컫는 말로 연인으로 이르기 전 '내거 인 듯, 내거 아닌, 내거 같은 너'를 두고 '썸을 탄다'고 한다. 어느 시인이 말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썸은 누구의 입에서 태어났을까. 우리는 언제 어떻게 썸을 타서 누군가에게 꽃이 될까.
남해의 아침 바다는 얌전했다. 지난밤 문학행사 후의 뒤풀이로 따끈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한 아침이었다. 주최 측이 준비한 믹스 커피는 있었으나 커피포트가 없었다. 물을 끓일 주전자도 마땅치 않았고, 가스렌지도 보이지 않았다. 남녀 회원들이 머리를 짜도 방법이 없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샤워를 마친 J가 긴 머리를 털며 나오더니 커피 안 하시느냐고 물었다. 사정을 듣더니 밥솥에 물을 붓고 전원을 켰다. 놀라운 발상이었다. 순식간에 밥솥에 김이 오르며 물이 끓기 시작했다. 밥공기에 커피가루를 담고 국자로 물을 뜨니 훌륭한 커피가 완성되었다.
상남자 K가 기다렸다는 듯이 밥공기에 담긴 커피를 숭늉처럼 단숨에 들이키더니 한 잔을 더 청했다. 지난밤 토론회에서 J에게 언성을 높였던 일도 잊은 모양이었다. 질의 도중 K는 경상도 특유의 거친 표현으로 J를 몰아부쳐 주위를 긴장시켰다. 남자끼리였다면 주먹이라도 날아갈 듯 험악한 분위기가 아니었던가.
J 역시 건망증이 있는 모양이었다. 토론회 사건은 이미 다 잊은 듯 천상 여자의 얼굴로 조신하게 커피를 따르니. K가 보기 좋게 그것을 마셨다. 두 사람 다 약속이나 한 듯 멀쩡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신기하여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커피 후 산책을 위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해의 아침은 동해와 달랐다. 꿈을 꾸듯 안으로 비밀을 삼키며 끝없이 망망대해로 펼쳐져 있었다. 여명이 수평선을 물들여가는 것으로 보아 해가 곧 뜰 모양이었다. 마침내 여명은 무지갯빛을 뿜어냈다. 우리는 팔을 들어 해를 맞으며 바닷가로 뛰쳐나갔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바닷가를 한참이나 거닐다 보니 J와 K가 보이지 않았다. 둘이서만 테라스에 남아 따로 해맞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어젯밤의 미진한 토론을 다시 시작했는지, 서로의 꽃이 되기 위해 썸을 타는 중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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