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이란 주제로 특강을 하고 있다. 권혁준기자 hyeokjun@yeongnam.com
지난달 22일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이란 주제로 특강을 하고 있다. <대구간송미술관 제공>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다'라는 말이 있어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름이지만, 우리는 추사체라는 글씨체를 중심으로 그를 알고 있어요."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지난달 22일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열린 특강을 통해 김정희의 생애와 예술 세계를 소환했다. 이날 '추사의 삶과 예술'이라는 주제로 강연에 나선 유 관장은 추사가 겪은 가문의 비극과 그의 독창적 서체인 '추사체'가 완성된 배경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그를 조선 후기 국제적 학문 네트워크를 주도한 K-콘텐츠의 원류로 평가했다.
유 관장은 추사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애 전반을 따라가며, 그가 남긴 학문적·예술적 성취가 어떤 삶의 굴곡 속에서 형성됐는지를 짚었다. 그는 "추사의 이미지는 굉장히 인자하고 부드러울 것 같지만, 삶은 그렇지가 않았다"며 "참 많은 풍파를 겪었고, 그 아픔을 자신의 사상과 예술 속에 녹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유 관장은 먼저 조선시대 양자 제도가 개인에게 남긴 인간적 갈등에 주목했다. 생부가 살아 있어도 큰아버지를 '아버지'로, 생부를 '작은 아버지'로 불러야 하는 삶 속에서 남다른 내면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추사는 '월성 김씨'라는 명문가의 귀공자로 태어났으나, 8살 때 김노영의 양자가 됐다"며 "조선시대에 양자로 갔던 사람들에게는 그러지 않은 사람과 다른 인간적인 감정이 있다"고 말했다.
추사의 삶에서 결정적 전환점으로는 24살 때 생부를 따라 자제군관으로 북경에 간 일을 꼽았다. 유 관장은 이 청나라 연행을 통해 추사가 당대 청나라 최고의 학자였던 완원·옹방강 등을 만나며 시야를 크게 넓혔다고 설명했다. 이는 종전까지 있었던 청나라에서 조선으로의 일방적 문화 유입이 아니라, 조선 지식인이 청나라 학계와 직접 교류한 한중 문화 교류의 시초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추사는 청나라에서 당대의 대표적 학자인 완원을 만났고, 완원은 귀한 서적들을 보여주고 최고급 차를 대접했다. 추사는 완원을 깊이 존경해 '완당'이란 호를 사용하게 됐다"며 "또 옹방강을 만나 금석학 등에 눈을 뜨게 됐다"고 말했다.
유 관장은 추사의 말년 예술세계가 유배와 실사구시적 고증, 제자 교육 등을 거치며 독창적 서체인 '추사체'로 완성됐다고 해석했다. 특히 추사의 후기 작품을 설명하면서 "추사체의 특질은 '괴'"라고 짚었다. 기존의 반듯한 서법을 넘어 기이하면서도 깊은 조형성과 정신성을 갖춘 글씨가 추사 말년 예술의 핵심이란 것이다.
그는 추사가 교육자로서도 큰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예림갑을록'을 통해 그가 제자들과 예술에 대해 어떻게 대화하고 지도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추사의 제자 양성은 조선 후기 화단의 변화와도 연결된다고 봤다. 유 관장은 18세기 중국 색채를 뺀 조선 고유의 서풍을 정립하려는 흐름에서 동국진체가 유행했으나, 추사는 금석문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감을 제시하며 근대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유 관장은 "추사는 당대 최고의 학자였고, 금석학을 개척한 인물이었다"며 "자신의 예술만 완성시킨 것이 아니라 제자와 후배를 길러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오게 했다. 추사가 있음으로써 이후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었다는 점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권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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