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봉 스님이 상주 신흥사에서 선문염송을 분청에 새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선문염송(禪門拈頌)을 분청사기로 새긴다는 것은 단순한 도자 작업만이 아니라 문자(文字)를 흙으로 옮기고, 수행의 숨결을 불 속에 봉인하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전통 경판 인쇄를 단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서체로 현대적 감각과 선적(禪的) 정신을 함께 담아내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을 완성하면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인류 공동의 정신문화유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금봉 스님이 상주 신흥사에서 선문염송을 분청에 새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금봉 스님은 신흥사(경북 상주시 화북면 중벌리)에서 10여 년째 선문염송을 분청사기로 새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작업은 반쯤 말린 청자용 태토(흙) 위에 흰색 흙(화장토)을 바른 판에 선문염송을 쓰고 조각칼로 돋을새김을 한 후 가마에서 구워내는 순으로 진행된다.
금봉 스님이 선문염송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분청은 흙이 마르기 전에 글자를 새겨야 한다. 흙이 마르면 새기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갈라지고, 너무 질면 글자가 뭉개진다. 그러나 제대로 만들어 놓으면 불에 타지 않고, 나무보다 습기에 강하다. 땅속이나 물속에 있어도 글자가 그대로 보존되기 때문에 목판보다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이는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는 경남 합천 해인사 출신인 스님이 분청을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저는 39년 전 해인사에 출가하여 해인사승가대학에서 팔만대장경을 공부하다가 체질에 맞지 않는 것 같아 중퇴하고 글을 보지 않고 수행하는 참선을 하였습니다."
스님은 지금도 결제안거(結制安居=여름철과 겨울철 3달 수행기간) 때가 되면 선방에서 정진하고 해제(解制=안거 수행이 없는 기간) 때는 신흥사로 돌아와 선문염송을 새기는 작업을 한다.
"제가 신흥사에 오게 된 것은 2019년 대구에 있던 포교원 건물이 재개발 구역에 포함돼 없어지게 됐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으로 포교원을 옮겨야 하는데 마땅히 갈 곳을 찾지 못했는 데 어느 스님으로부터 상주와 문경이 물이 좋다는 말을 듣고 이쪽에서 절집 터를 찾아 다녔습니다. 오랫동안 적당한 곳을 물색하던 중 속리산 뒤쪽에 있는 신흥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금봉 스님 신흥사의 내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금봉 스님은 이곳에 오자마자 신흥사의 위치가 불도를 닦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임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신흥사 대웅전에 서서 정면을 보면 속리산 주봉(主峯)에서 묘봉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는 기암괴석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흥사 전경
신흥사는 1925년 불교신자 김교순씨가 건립했다. 경내에는 신흥사의 내력을 기록한 김교순여사사리급신흥사창건비와 사리탑이 있다. 비문에 의하면 김교순은 1881년(고종 18) 경북 예천 출생으로, 21세 되던 해인 1901년 보은 속리산에서 용허선사로부터 보살계를 받았으며 안락행(安樂行)이라는 불명을 얻었다. 지금도 신흥사에는 대웅전과 약사전·칠성각·사천왕문 등 그가 세운 건물 대부분이 원형대로 서 있다.
궁창에 국화문양이 새겨진 약사전
대웅전 왼편 앞에 위치한 약사전의 문은 국화문양으로 장식돼 있는데, 김씨는 이 때문에 법당 건립 다음 해 1월에 일경에 체포됐다. 일제강점기에 국화문양은 일왕만 사용할 수 있는데, 이를 무단으로 절집 문에 새겼다는 게 그 이유였다. 소위 국화문 사건이다. 김씨는 이 일로 대구재판소에 수감됐으며 수감 중 20일간 단식 염불을 해 일본 경찰을 놀라게 했고 한다.
문제가 됐던 국화문양은 문의 궁창(宮窓.사찰 법당의 문짝 하단에 창살 없이 나무판자로 메워진 부분)에 조각돼 있다. 국화문의 가운데는 노란색이며 주변은 보라색, 그리고 밖에는 붉은 색이 칠해져 있다. 이 문양 때문에 김씨는 수감생활까지 했는데, 웬일인지 문제의 국화문은 지금까지 멀쩡히 남아 있다.
"안락행이 돌아가시기 전에 '머리맡에 향로를 가져오라'고 하시면서 '내가 죽으면 비가 올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돌아가시고 화장을 하고 내려왔는데 그 화장한 곳에 불이 난 것 같아 올라가보니 오색구슬이 반 그릇 정도 되어 종단에 검증을 받으니 사리라고 판명되어 그 당시 불교신문에 게재 되었다고 합니다."
김교순여사사리급신흥사창건비와 사리탑은 약사전 앞에 나란히 서 있다.
"해인사 백련암에 주석하셨던 성철 큰스님께서도 '견성(見性)하면 성불(成佛)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선(參禪)은 문자(文字)를 세우지 않고 곧바로 마음을 보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마음 깊은 곳에 두고 그것을 향해 끝없이 자신과 부딪히고 싸우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선문염송은 참선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해놓고 집중하는 화두의 백과사전 격으로 고려 후기 진각국사 혜심선사가 편찬했다.
금봉 스님이 약사전 앞에 있는 김교순여사사리급신흥사창건비와 사리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선문염송은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知訥)의 제자이자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의 제2세인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慧諶 1178~1234)이 선종불교의 화두를 모아 편집한 공안집(公案·깨달음을 위한 공식적인 문제. 화두)입니다. 본래는 혜심이 제자 진훈(眞訓) 등과 함께 1천125칙의 공안 및 그에 대한 착어들을 모아 1226년(고려 고종 13)에 30권의 『선문염송집』을 간행하였는데, 이후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할 때 『선문염송집』의 목판이 소실되었습니다. 이에 혜심의 후배이자 수선사 제3세 사주가 된 청진국사 몽여(淸眞國師夢如 ?∼1252)가 347칙의 공안과 착어를 추가하여 새롭게 편집하였는데 지금은 1천463칙 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금봉 스님이 선문염송을 분청사기에 새기기로 마음 먹은 것은 해인 총림 전 전계사였던 그의 은사 종진 스님 때문이다. 종진 스님은 선문염송의 모든 출처를 정리하고 교정하여 두 권의 책으로 출간하고 입적했다. 금봉 스님이 분청에 새기는 선문염송은 종진 스님이 남긴 두 권의 책이다.
대웅전 앞에 선 금봉스님
분청 선문염송을 제작할 뜻을 세운 금봉 스님은 처음에는 분청에 글을 새기는 기술자에게 이 작업을 의뢰했으나 작품이 되지 않았다.
"분청 사기분야에서 손꼽히는 분들에게 맡기자니 돈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수정을 할 수도 없고 경판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제작할 수도 없어서 곤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견을 잘 반영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니 어딘가 미진한 면이 있어서 선문염송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직접 제작하기로 작심하고 지리산에서 분청사기 전문가를 만나 기술을 익혔다. 스님은 분청기술을 익히고 글자를 새겨 넣는 방법을 연구하여 청자와 백자에 글자를 프린트하고 새기는 기술을 개발, 특허출원까지 했다.
금봉 스님은 선문염송을 분청에 새기기에 앞서 현대 감각에 맞는 새로운 서체를 개발하여 1만 자에 달하는 서산대사 휴정의 선가귀감(禪家龜鑑)을 완성했다. 그러나 70여 만 자에 이르는 선문염송을 모두 새기기까지에는 기나긴 여정이 놓여있다.
고려 시대 팔만대장경 5천여 만 자를 나무에 새길 때는, 글자만 조각하는데에 12년 동안 연인원 130만 명이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 종교의 차원을 넘어 국가적 사업으로 진행한 것이다. 그에 비하면 분청 선문염송은 규모는 그에 미치지 못하지만 전 국민이 관심을 갖고 힘을 모아야 완성이 가능할 작업이다.
금봉 스님은 "과거의 팔만대장경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서원(誓願)이었다면, 오늘의 분청선문염송은 인간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서원"이라며 "전통과 현대를 잇고, 수행과 예술을 잇고, 한국의 정신문화와 세계인의 마음을 연결하는 새로운 문화운동이 이곳에서 시작되기를 발원(發願)한다"고 말했다. 글·사진=이하수 기자
이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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