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울진군 후포항 동쪽 먼바다 약 25㎞ 해상에 자리한 왕돌초에 동해 해저점 무인등대 모습. <원형래기자>
경북 울진군 후포항 동쪽 먼바다 약 25㎞ 해상에는 동해 바다 아래 거대한 암반 왕국이 숨어 있다. 수면 위에서는 일부 암초만 드러날 뿐이지만, 바다 아래에는 수백 년 동안 울진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온 거대한 수중 생태계가 이어져 있다.
울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을 '왕돌초'라 불러왔다. 왕처럼 크고 웅장한 돌무리가 바다 아래 펼쳐져 있다는 뜻이다. 왕돌초는 울진대게의 고향이자 동해안 최대 규모의 천연 수중 암반지대이며, 수많은 어종이 살아가는 해양생태 보고다.
왕돌초 해역은 동서 약 21㎞, 남북 약 54㎞ 규모의 거대한 해저 암반지형으로 형성돼 있다. 지역 어민들은 중심 암반을 '맞참', '중간참', '셋참' 등으로 구분해 부른다.
가장 얕은 곳은 수심 5m 안팎이며 깊은 곳은 100m 가까이 이어진다. 울퉁불퉁한 암반과 수중 절벽, 협곡 형태의 지형이 복합적으로 형성돼 있어 다양한 해양생물이 살아가기 최적의 환경을 만든다.
왕돌초 바다 속에서 산호와 서식하는 생물들 모습.<원형래기자>
◆한류와 난류가 만든 동해 최고의 황금어장
왕돌초가 특별한 이유는 독특한 해양환경 때문이다. 이곳은 북한한류와 동한난류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차가운 한류와 따뜻한 난류가 만나며 플랑크톤이 풍부하게 형성된다. 이는 다양한 어종이 모여드는 동해 최고의 황금어장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왕돌초 해역에는 울진대게와 붉은대게를 비롯해 대구, 방어, 부시리, 볼락, 임연수어, 자리돔, 문어, 망상어 등 수십 종의 해양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울진대게는 왕돌초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차가운 동해 수온과 풍부한 먹이 환경, 복합적인 암반 구조는 대게가 성장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주고 있다. 후포와 평해, 기성, 죽변 일대 어민들에게 왕돌초는 단순한 조업 해역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삶의 바다인 셈이다.
후포에서 40년 넘게 조업을 이어온 한 선주는 "예전에는 왕돌초 물길을 읽을 줄 알아야 진짜 뱃사람이라는 말을 했다"며 "대게철이면 새벽 어둠 속에 왕돌초로 향했고, 그 바다가 가족과 울진을 먹여 살렸다"고 회상했다. 이어 "풍랑이 심한 날에는 목숨을 걸고 나가야 했지만 결국 왕돌초는 후포 사람들에게 생명줄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맑은 날에는 햇빛이 깊은 바다 아래까지 비치며 에메랄드빛 수중 풍경이 펼쳐진다. 암반 사이에는 다시마와 미역 등 해조류가 숲처럼 흔들리고, 그 사이를 수많은 어군이 이동한다.
조오석 바다목장 대표는 바다속 정화와 잠수사를 교육안전에 힘쓰고있다.<원형래기자>
지역 잠수사이면서 조오석 바다목장 대표는 "왕돌초 바닷속은 동해안에서도 보기 드문 입체적인 수중 암반지형이 발달해 있다"며 "거대한 수중 절벽과 해조류 군락, 물고기 떼가 어우러지는 모습은 마치 바다 아래 또 하나의 산맥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왕돌초 바다에 해양 오염에 앞장서는 잠수사를 모습.<원형래기자>
◆기후변화 직격탄 맞은 왕돌초 생태계
왕돌초는 단순한 어장을 넘어 해양생태의 보고로도 평가받고 있다. 국립수산과학원 동해수산연구소 조사에서는 왕돌초 해역에서 40여 종 이상의 어류가 확인됐다. 해양수산부 조사에서는 120종이 넘는 해양생물이 서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왕돌초 주변 해조장은 어린 물고기들의 산란장과 서식처 역할을 하며 동해 수산자원 회복의 핵심 공간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 역시 왕돌초를 동해안 대표 바다숲 조성 해역 가운데 하나로 선정해 해조장 보호와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왕돌초 해역의 생태계는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국립수산과학원 자료에 따르면 동해 표층 수온은 지난 50년 동안 약 1.8도 상승해 세계 평균 상승 폭을 크게 웃돌았다. 이로 인해 왕돌초 주변에서는 과거 흔했던 대구와 오징어 등 한류성 어종이 감소하는 반면 방어와 삼치, 참다랑어 같은 난류성 어종 출현은 크게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왕돌초가 한류와 난류의 경계에 위치한 만큼 동해 해양생태 변화의 흐름을 가장 민감하게 보여주는 해역 가운데 하나라고 분석한다.
왕돌초는 동해 해양환경을 분석하는 중요한 관측 거점 역할도 하고 있다. 포항지방해양수산청은 지난 2003년 왕돌초 해역에 해양관측 부표를 설치해 풍향과 풍속, 기온, 기압, 수온, 염분도 등을 실시간 관측하고 있다. 생태적, 산업적 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왕돌초를 체계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독도, 울릉도 일대와 함께 왕돌초 해역의 해양생태계 기본조사를 지속하고 있으며, 일부 전문가들은 무분별한 남획과 갯녹음(백화현상) 방지를 위해 해양보호구역(MPA) 지정 등 중장기적인 관리 마스터플랜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보존과 활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지자체와 정부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왕돌초 바다 속 부채모양의 대형 산호 모습.<원형래기자>
◆왕돌초 머드…미래 해양바이오 산업 가능성
최근 왕돌초는 또 다른 가능성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바로 '마린머드' 자원이다.
왕돌초 인근 후포분지 해저에는 입자가 매우 미세하고 미네랄 성분이 풍부한 해양 머드층이 형성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울진군과 연구기관들은 이 머드를 활용한 해양바이오 산업 가능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실제 마스크팩과 로션, 에센스 등 시제품 개발도 진행되고 있다.
특히 왕돌초 머드는 일반 갯벌 머드와 달리 깊은 바다 아래 장기간 퇴적된 펠로이드 형태로 미네랄 함량이 높고 불순물이 적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후포에 거주하는 권기홍(70)씨는 왕돌초 머드에 대해 누구보다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어릴 때 어른들이 바다일을 마치고 나면 손이나 얼굴에 바닷흙을 발랐던 기억이 있다"며 "그때는 그냥 바다 흙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왕돌초 머드가 피부 진정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가 나오는 걸 보며 신기했다"고 말했다.
이어 "왕돌초는 단순히 고기 잡는 바다가 아니라 앞으로 울진 미래 산업까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바다"라며 "후손들에게도 반드시 잘 보전해서 물려줘야 하는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이상업 울진군 해양수산과장은 "왕돌초는 울진을 대표하는 해양생태 자원이자 수산경제의 핵심 기반"이라며 "해양환경 보전과 수산자원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왕돌초는 단순한 어장이 아니라 울진 바다의 역사와 어민들의 삶, 미래 산업 가능성까지 담고 있는 공간"이라며 "지속적인 보전과 연구를 통해 왕돌초의 가치를 더욱 높여 나가겠다"고 말했다.
동해의 푸른 물결 아래 숨겨진 거대한 생명의 왕국. 왕돌초는 지금도 조용히 울진의 바다와 미래를 함께 품고 있다.
원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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