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이후 가재 털어 의병 모집
연합진 꾸려 일본군 맞서 치열한 전투
의병진 해산 뒤에도 항일투쟁 계속
영흥학교 설립해 교육 통합 구국의지
대한제국 무너져 스승따라 죽음 결심
'천길 물 속 내 한 몸 간직할 만하다'
부친 상례 후 대지팡이 짚고 '도해'
1910년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1914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벽산은 도해순국을 결심했다. 김도현은 1914년 11월7일 관어대 앞바다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다로 걸어들어갔다. 벽산이 도해 순국한 산수암에 세워진 영덕 도해단.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집집마다 칼을 갈고, 사람마다 마음을 합하고 힘을 모아 일제히 소리 질러 왜노들과 한 번 싸워야 할 것이다. 지난날 성취하지 못했던 일을 통탄하며 장래 광복할 것을 맹서하나니, 금년 11월7일 동지에는 동해에서 죽어 왜적을 기어코 멸망케 할 것이다."
1914년 11월6일 새벽, 구한말의 의병장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은 '동포들에게 드리는 글'을 썼다. 그리고 그날 영해를 가로질러 관어대 앞바다 대진에 도착해 새벽 찬 바람을 맞으며 산수암 바위에 올라 떠오르는 해를 기다렸다. 11월7일 아침, 그는 바다와 해를 향해 걸어 들어갔고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벽산 김도현
김도현은 1852년 7월14일 경북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명옥(明玉), 호는 벽산(碧山)이다. 아버지는 참봉 김성하(金性河), 어머니는 한양조씨이며 단종 복위사건에 가담하여 처형되었던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4세손이다.
그는 태어난 후 300일 동안 울지 않았다고 한다. 모두가 이상히 여겼는데, 처음으로 울 때 그 소리가 웅장하여 사람들이 더욱 놀랐다고 한다. 김도현은 유년기에 조부 김하술(金夏述)의 가르침을 받았다. 조부는 생가 근처에 괴암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김도현은 그곳에서 글을 배웠다. 어린 시절 아이들과 놀 때면 나무를 깎아 병사를 만들고, 모래로 그림을 그려 진을 치고, 돌을 모아 성채를 만들어 군진놀이를 했다고 한다. 8세 때는 마을 앞 개천에서 돌로 둑을 쌓고는 '수중기일성(水中起一城)'이라는 글을 지었는데 조부가 이를 보고 범상치 않은 아이라 귀여워하며 후일에 크게 되리라 기대했다고 한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김도현은 세상이 크게 어지러울 징조라 여기고 병서를 주야로 탐독했다. 또한 향리의 동지 및 후배들과 점고회(點考會)를 조직해 병사를 훈련시켰다. 이후 1894년 동학군이 봉기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그는 마을 뒷산인 검산(劒山, 혹은 검각산)에 성을 쌓았다. 검산성이다. 자신의 재산을 털었고, 그의 일족과 소작인들은 돌을 날랐다. 규모는 다소 작았지만 돌들의 이음새에 허술함은 없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졌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을미의병이다. 벽산은 가재를 털어 봉화 청량산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지역 유생과 일가권속이 나라를 위해 의병으로 나섰다. 벽산이 이끄는 영양 의병은 곧 경북 지역 7개 의병과 연합의진(聯合義陣)을 꾸리고 3월에는 예안의 선성의진과 연합하여 중군장으로서 전투의 맨 앞으로 나섰다.
영덕 도해단 전각 안 비석. '천추대의(千秋大義)' 네 글자는 1971년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로, '천 년에 빛나는 큰 뜻'이라는 의미다.
◆마지막 을미의병
1896년 4월 벽산은 강릉의진과 연합하여 또다시 선봉에 섰다. 강릉 대공산성 전투, 대관령 길목의 보현산성 전투, 삼척 전투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화력이 부족하던 의병은 끝내 밀려나고 말았다. 그는 삼척전투에서 패한 뒤 영양으로 돌아와 검산성에 본진을 두고 진영을 재편성했다. 그리고 검산성을 중심으로 영양, 안동, 청송, 영덕, 영해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6월에는 입암전투와 소청전투를 펼쳤지만 패하고 말았다. 그가 이끄는 의병진은 열등한 무기로 인해 패퇴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7월에는 영해읍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김하락 의진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영덕 오십천 변의 남천 숲 전투다. 벽산은 남천 숲 전투 직후 영양으로 향했다. 그 뒤로 그는 의병을 이끌고 영양과 청량산, 예안지역을 떠돌면서 일본군과 관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또 맞섰다. 이웃 의병부대와 연합할 길을 찾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9월 중순을 넘어서자 대부분의 의병부대가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봄부터 고종의 거듭된 의병해산권고가 있었고 의병 활동도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예안의 선성의진이 9월 20일 해산했다. 안동의진도 9월25일 대장 김도화가 물러나면서 끝을 맺었다.
결국 벽산의 의병부대만 남았다. 그는 고종의 권고를 받고 해산을 결심했다. 벽산은 군사를 시켜 총 113자루를 숨기고 해산을 준비하면서 영양 곳곳을 돌아다녔다. '여러 진 군사들이 모두 해산했으니 나만 홀로 군사를 유지할 수 없은즉 깊은 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자'는 것이 김도현의 다짐이었다. 10월15일 중양절, 벽산은 따르던 병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마침내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이것이 을미의병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의 항일 의병 투쟁 전말을 일기체로 기록한 창의록을 남겼다. 의병 봉기를 모의한 1895년 12월1일부터 의병진을 해체한 1896년 10월15일까지 약 10개월 동안의 일들이 날짜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벽산이 도해 순국한 산수암에 세워진 영덕 도해단 입구에 있는 선생의 유시(遺詩) 시비.
◆상소투쟁, 의병격문, 구국교육활동
벽산은 의병진을 해체하고 은거했지만 이후에도 항일 활동을 계속했다. 1902년과 1904년에는 의병을 다시 일으킬 것을 촉구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이른바 을사오적의 처단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각국 공사관에 포고문을 보내 조선을 강제 병합하려는 일제의 횡포를 막는 데 힘써 달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1906년 1월 포수 50~60명을 축으로 삼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그의 집안과 고향 마을 일대가 안동진위대에 의해 아비규환이 되었고 김도현도 붙잡혀 혹독한 날을 보냈다.
이즈음 벽산은 고종황제로부터 밀지를 받는다. '밀칙으로 경에게 분격장군을 내리고 겸하여 은밀히 효유하노라. 경은 모름지기 우리 선왕들을 은혜롭게 하고 우리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의로운 군대를 고무하여 먼저 도적들을 피곤하게 하고 간흉을 제거하여 나라의 원수를 물리치도록 하라!'
그러나 벽산은 다시 의병을 일으킬 만한 여유가 없었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 있었고 관군과 일본군이 그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삼남지역 각 군에 격문을 보내 거병을 촉구했다. 그리고 지역의 유지들과 옛 영양관아의 객사를 수리해 영흥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교장에 선임되어 교육을 통한 구국의지를 펴기도 했다.
벽산의 생일인 음력 7월14일에는 도해단 전례가 열린다. 정부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벽산이 도해 순국한 산수암에 세워진 영덕 도해단.
◆바다로 걸어들어가다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이 무너졌다. 벽산은 며칠을 통곡했고 자결을 결심했다. 그가 자결순국을 결심한 데는 스승 이만도의 영향이 컸다. 김도현은 1896년 선성의진과 연합해 중군장으로 활약하면서 이만도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이만도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단식에 들어갔다. 스승의 단식투쟁을 지켜보던 벽산은 함께 자결을 결심했으나 이만도는 만류했다. 당시 김도현의 부친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보다 먼저,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는 뜻을 미뤘다. 그에게 남은 재산은 없었지만 부모 봉양에는 극진했다고 전한다. 이만도는 단식 24일째에 순절하였다.
1914년 7월, 벽산의 아버지 김성하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상례를 마무리 지은 후 뜻을 밝혔다. 도해순국(蹈海殉國)이다. 도해란, 바다에 걸어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뜻이다.
'늦게야 죽으려니 묻힐 땅이 어디인가./ 옛 나라의 남겨 둔 땅이 없구나./ 노중련이 바다 밟아 떠난 지 수천 년에/ 밝은 달이 오히려 비춰 있구나.'
노중련은 중국 제나라 사람으로 '진나라가 천하를 차지한다면 바다를 밟고 들어가 죽겠다'고 저항한 인물이다. 노중련은 실제 죽지 않았지만 그의 고사 이후 '도해'라는 말은 절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벽산의 시는 이미 적의 것이 된 이 땅에 자신의 육신을 둘 수 없다는 비장한 뜻을 굳힌 글이었다.
벽산 도해순국 111주기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영덕군 제공>
1914년 11월7일 동짓날, 벽산 김도현은 영해 대진의 북쪽 산수암에 올라 떠오르는 해를 기다렸다. 아침 8시 무렵 그는 유서 한 통을 바위에 올려놓고 관어대 앞 바닷가로 나가 상복과 신발을 벗어 접어놓은 뒤 옷깃을 여미고 몸을 단정히 했다. 그리고 상중에 쓰는 대지팡이를 짚고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파도의 가운데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는 것을 나루터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둘러서서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다로 그대로 걸어 들어가서 시신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벽산의 나이 63세였다. 바다로 걸어 들어가기 전,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조선왕조 오백년 마지막에 태어난 나/ 붉은 피 온 전신에 엉키었구나./ 중년의 독립운동 19년에/ 머리칼은 늙어 서리 끼었는데/ 나라가 망하니 눈물이 하염없고/ 어버이 여의니 마음도 아프구나./ 머나먼 바다가 보고팠는데/ 이레가 마침내 동지이더라./ 홀로 외롭게 서니 옛 산만 푸르고/ 온갖 헤아려도 방책이 없네./ 희고 흰 저 천길 물속이/ 내 한 몸 넉넉히 간직할 만하여라.'
지금 그 바다 앞 산수암에 도해단(蹈海壇)이 서 있다. 그리고 해마다 벽산의 생일인 음력 7월14일에 '도해단 전례'가 열린다. 1962년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이지용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 전문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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