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결실의 계절이다. 들판에는 곡식이 익고 과수원에는 열매가 무르익는다. 우리는 흔히 가을 풍경을 보며 '수확'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가을의 결실은 가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봄에 뿌린 씨앗과 돋아난 새순, 여름의 햇빛과 비바람을 견딘 시간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다. 아이의 성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는 한스 기벤라트라는 소년이 등장한다. 그는 총명하고 성실한 학생이다. 주변 어른들은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더 높은 성취를 기대한다. 아버지와 교사, 목사와 마을 사람들은 한스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 기대에는 악의가 없다. 모두 한스를 위한 마음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가 얼마나 빨리,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에만 관심을 기울였다는 데 있다.
한스는 공부를 잘했지만 점점 자기 삶의 리듬을 잃는다. 낚시를 하고 자연 속을 거닐며 친구와 어울리던 시간은 줄어든다. 휴식과 방황, 사색의 시간은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수레바퀴를 따라 달리지만 결국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헤세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경쟁교육의 폐해만은 아니다. 아이의 성장에는 밖에서 재촉한다고 빨라지지 않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이다. 어른의 기대가 선의에서 출발하더라도 아이의 속도와 호흡을 무시하는 순간 그것은 격려가 아니라 무언의 압박이 될 수 있다.
오늘의 부모도 비슷한 유혹에 빠지기 쉽다. 시험을 치르면 점수부터 묻고, 성적표가 나오면 등수의 오르내림부터 살핀다. 항상 얼마나 성적이 올랐는지 확인하고, 책을 읽어도 입시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생각한다. 물론 결과는 중요하다. 아이가 공부한 만큼 성취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넓혀 가도록 돕는 것은 부모의 역할이다. 그러나 교육에서 결과만 바라보기 시작하면 정작 결과를 만들어 내는 보이지 않는 힘을 놓치게 된다. 부모가 보아야 할 것은 지금 몇 점을 받았느냐뿐 아니라 아이가 그 점수에 이르기까지 어떤 태도와 습관을 만들어 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공부의 진짜 자산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책상에 앉는 습관, 모르는 것을 그냥 넘기지 않는 태도,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어 내는 끈기, 틀린 문제를 다시 보는 인내, 실패한 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시작하는 힘이 오랜 시간 축적되어 어느 날 실력으로 나타난다. 시험 점수는 그 축적이 잠시 밖으로 드러난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 힘은 당장 성적표에는 나타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를 멀리 가게 하는 밑천이 된다. 축적의 속도와 방식은 아이마다 다르다. 모든 꽃이 같은 계절에 피지 않는다. 비교가 위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모는 아이에게 자주 묻는다. "이번에는 몇 점 받았니?" 이 질문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지난번보다 무엇을 더 알게 되었니?", "어떤 습관이 새로 생겼니?", "힘들었지만 끝까지 해낸 것은 무엇이니?"라고 물어보면 어떨까. 이런 질문은 아이의 시선을 결과에서 과정으로 옮긴다. 아이는 자신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오래 공부할 힘을 얻는다.
특히 성적이 기대만큼 오르지 않을 때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눈앞의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쌓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무가 땅 위로 자라는 동안 뿌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깊어지고 있다. 아이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다. 겉으로 변화가 없어 보여도 생각하는 힘이 깊어지고, 실패를 견디는 힘이 생기고, 자기 방식으로 공부하는 법을 익히고 있을 수 있다. 이런 시기에 필요한 것은 재촉보다 기다림이고, 비교보다 관찰이다. 부모가 믿고 기다려 주는 시간 역시 아이 안에 쌓이는 중요한 성장의 자산이 된다.
가을은 한 해의 성장을 돌아보기에 좋은 계절이다. 무엇을 거두었는지만 따지기보다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견디고, 무엇을 새롭게 시작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이와 함께 지난 시간을 천천히 되짚어 보면 성적표에는 기록되지 않은 변화들이 보인다. 스스로 책상에 앉게 된 날, 어려운 문제를 포기하지 않은 순간, 친구와의 갈등을 풀어낸 경험도 모두 성장의 기록이다.
이번 가을에는 아이에게 "얼마나 이루었니?"라고 묻기보다 "지난봄의 너와 지금의 너는 무엇이 달라졌니?"라고 물어보면 어떨까. 교육은 아이를 남보다 앞세우는 일이 아니라 어제의 자신보다 조금 더 단단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 일이다. 결국 부모가 지켜보아야 할 것은 어느 순간의 성적이 아니라 아이가 자기 힘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 갈 사람으로 얼마나 충실히 자라고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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