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철균 경북연구원장
토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은 세계만화사의 밤하늘에 북극성처럼 빛나는 불멸의 걸작이다. 2억6천만 부가 팔리고 80개국에 번역된 이 위대한 만화는 31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으로 계속 확장되면서 매년 2조 원 가까운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치열한 수련, 변신에 따른 전투력 상승,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는 배틀에 몰입된 독자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손오공, 부르마, 무천도사, 크리링, 베지타, 피콜로 대마왕의 모험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갈수록 스토리는 딜레마에 부딪힌다.
그것은 주인공들이 초인적으로 강해질수록 인간은 멈춰 선 존재, 혹은 '우주의 실패작'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점점 더 인간 속에서 자랐으되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 위에 군림하는 초인적인 힘이 된다.
그리하여 자마스, 오공 블랙 같은 악역의 초인간들은 '어리석은 닝겐(人間)' '하찮은 닝겐 따위가 ……' 같은 냉소를 날리며 인류를 멸망시켜 버린다. 이때 일본어 '닝겐'은 중립적인 명칭 '인간'보다 훨씬 더 강한 경멸과 폄하의 뉘앙스를 갖고 있다. <드래곤볼>은 이 암울한 결론을 얼버무리기 위해 '다중우주'라는 설정을 붙여 간신히 해피 엔딩을 만들어낸다.
2026년 9월 <드래곤볼>은 우리에게 다시 강렬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보다 강해진 존재에 의해 인간이 '닝겐'이 될 때 인간은 무엇으로 그것과 공생할 수 있는가.
9월8일 오픈AI는 1만 개의 에이전틱 AI들을 88시간 동안 서로 토론하도록 하여 밀레니엄 7대 난제 중 하나인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을 풀었다고 발표했다. 아직 공식적인 검증 절차는 남아 있지만 수학자들이 무려 90년 동안 풀지 못했던 미해결의 난제를 AI가 해결해서 166페이지의 수학 논문으로 생성한 것이다.
9월13일에는 앤쓰로픽의 CEO 다리오 아모데이가 AI가 스스로 다음 단계의 AI를 만드는 재귀적 자기 개선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고 경고하며 AI 개발의 속도 조절을 제안했다. 9월25일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초지능이 야기할 사고에 대한 양자 소통 채널 '미중 초지능 대화' 개설에 합의했다.
숨가쁘게 전개된 9월의 일들은 과연 초지능의 관리가 가능한가, 우리는 초지능을 관리해서 그것과 공생할 수 있는가라는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초지능 관리라는 말은 얼핏 형용모순처럼 들린다. 방정식을 풀기는커녕 검증하는 것조차 힘겨운 닝겐, AI가 생성한 풀이의 수백만 건 에이전트 메시지, 천억 단위의 토큰, 그 아래의 가중치와 활성값을 따라 읽는 것조차 버거운 '닝겐'이 어떻게 초지능을 관리한다는 것인가.
초지능 시대의 핵심 학문이 'AI 평가학'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고뇌의 해답은 정해져 있다. 초지능의 관리는 가능하며 가능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첫째, 인간은 초지능의 결과를 설명하지 못해도 과정을 관찰할 수는 있다. AI는 복잡한 데이터를 인간이 읽을 수 없는 수치 벡터로 바꿔 처리한다. 이 블랙박스 안에 인간이 읽을 수 있는 표기를 끼워 넣으면 인간이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 생긴다. 이것을 '관찰가능한 중간 표현(OIR)'이라고 한다.
둘째, 평가자는 생성자의 추론을 전부 알 필요가 없다. 의사도 환자 신체의 수십조 세포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생화학적 반응을 다 알지 못한다. 그래도 심전도, 혈압, 혈액검사, MRI, CT가 만드는 관찰 가능한 중간 표현들을 통해 환자 상태를 평가하고 치료한다. "생성하기는 어려워도 확인하기는 쉽다"는 생성-평가의 비대칭성이 인간이 AI를 평가할 수 있는 기반이다.
셋째, 모든 추론에는 흔적이 남는다. AI와 인간의 지능 격차가 박사와 초등학생만큼 벌어져도 초등학생은 저 박사가 밤새 공부했는지 술 마시고 놀았는지는 안다. 결과 대신 과정의 흔적을 보는 흔적(Trace) 기반 감독은 격차가 아무리 커져도 유효하다. AI가 어떤 자료를 읽고 어떤 도구를 불렀으며 어디서 머뭇거렸는지를 남긴 기록이 곧 그 흔적이 된다.
AI 평가학에서 한국은 고유한 자산을 가지고 있다. 기계 설비의 이상음을 듣는 피지컬 AI, 청진음을 판독하는 의료 AI처럼 소리를 다루는 AI는 지금 음향을 블랙박스로 받아 결과만 내놓는다. 만약 우리가 그 중간에 충분히 정밀한 음성 표기를 넣는다면 "AI가 틀렸다"에서 멈추지 않고 음향 포착, 음소 분절, 단어 인식, 의미 구성, 추론, 행동 가운데 어디에서 틀렸는지 짚을 수 있다. 이것이 관찰 가능한 음성적 중간 표현이다.
이 역할에 가장 알맞은 문자가 1443년 세종 이도에 의해 개발된 훈민정음, 즉 이도 문자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후서'가 밝혔듯이 이도 문자는 처음부터 사람의 말을 넘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현대 한글은 1만1천172개의 분절음밖에 표기하지 못한다. 그러나 순경음, 반치음, 아래아 같은 옛 글자와 연서, 병서의 운용법이 있는 이도 문자는 398억 5천677만 2천340종의 분절음을 표기할 수 있다. 기계들의 현란하리만큼 다양한 흡착음, 당김음, 기식음, 떨림음, 공명음, 의사가 청진기를 통해 듣는 신체 내부 장기의 소리까지 모두 표기할 수 있는 문자이다.
한국은 프런티어 AI 모델 개발 과정에서 기여한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지정학적 행운이 만든 HBM 제조의 경쟁력으로 AI 시대의 최대 수혜국이 되었다. 미국과 중국이 천문학적 투자를 하고 피를 흘리는 동안 과실을 누린 것이다. 이제는 받은 만큼 돌려줄 때다. 이도 문자에 기반한 음성적 중간 표현을 국제 표준으로 제안하고, 소리를 다루는 AI의 평가 체계를 한국이 설계해보자. 반도체를 팔아 번 돈의 일부를 AI 평가학에 투자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은 물건을 팔아서 돈만 버는 졸부국이 아니라 인류 공동의 과제에 공헌하는 리더십으로 존경받는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 닝겐은 초지능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닝겐은 초지능을 평가하고 관리하면서 공생할 수 있다. 한국은 583년 전에 이미 그 평가의 언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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