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 독백] 김재룡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장 “어둠 속에서 배운 세상, 다시 빛을 나누다”

  • 정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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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10-05 18:11  |  발행일 2026-10-05
김재룡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장의 사진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제작한 일러스트. 열린 문과 함께 걷는 모습은 시각장애인의 사회 참여와 자립을 상징한다. 이미지=Gemini

김재룡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장의 사진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제작한 일러스트. 열린 문과 함께 걷는 모습은 시각장애인의 사회 참여와 자립을 상징한다. 이미지=Gemini

안녕하세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회장 김재룡입니다.


어린 나이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됐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한창 친구들과 뛰어놀고, 세상에 궁금한 것도 많았을 나이에 눈을 잃었으니 그렇게 생각하실 만합니다. 그렇지만 제 대답은 여러분의 예상과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앞날을 걱정하며 깊이 절망했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누나들과 동생이 곁에서 도와줬고, 친구들이 돌아오면 함께 밖으로 나가 놀았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았습니다. 물론 보고 싶은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시 앞을 볼 수 있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보고 싶으냐고 물으시면, 저는 자식들의 얼굴이라고 답합니다. 부모님과 형제들의 얼굴은 기억에 남아 있지만, 아들과 딸의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옆에 누워 얼굴을 만져보며 어떻게 생겼을지 짐작하곤 했습니다. 이제는 다 커서 예전처럼 만져볼 수도 없지만요. 저는 남들처럼 일하고, 사업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왔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 친구들은 내가 조금은 보이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1970년 경북 의성군 옥산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었습니다. 위로 형과 누나들이 있었고, 아래로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도 저를 무척 아껴주셨습니다. 가족들 사이에서 귀하게 자란 아이였지요.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눈이 나빠졌습니다. 처음에는 눈이 잘 안 보인다고 말해도 부모님이 믿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 신발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밥상에서 반찬도 잘 집지 못하니 비로소 이상하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대구로 나와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약을 먹으면 낫는다는 말에 한 달을 채 먹지 않았는데 시력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나빠졌습니다. 여러 병원을 다닌 끝에 망막박리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큰 병원들을 전전하며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세상의 빛은 제게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김재룡 회장이 지난 6월 충남 에산에서 열린 한국시각장애인 지도자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제공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김재룡 회장이 지난 6월 충남 에산에서 열린 한국시각장애인 지도자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제공

부모님은 밭으로 일하러 가시고 친구들은 학교에 가는데, 저는 집에 누워 지내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들이 돌아오면 또 밖으로 나갔습니다. 워낙 사람들과 어울리고 노는 것을 좋아했거든요. 익숙한 동네 골목에서는 자전거까지 타고 다녔습니다. 담이나 집이 가까이 있으면 얼굴 쪽으로 어떤 느낌이 왔습니다. 그것에 기대 다녔는데, 길가에 낮게 앉아 쉬시던 어른들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부딪치기도 했고 아버지에게 혼도 났지요.


요즘 옛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하면, 그때 제가 조금은 보이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고 하면 놀라지요. 그러면 저도 웃으며 이야기합니다. 그때 좀 잡아주지 그랬느냐고요. 제 어린 시절에는 그런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 점자를 배우자 혼자 읽을 수 있는 책이 생겼습니다


시골에 있을 때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러다 누나의 친구를 통해 대구 광명학교를 알게 됐습니다. 그분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봉사를 하셨던 모양입니다.


입학 서류까지 준비했는데 아버지가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를 데려다 공부시키고, 먹여주고, 재워주려면 돈이 얼마나 들겠느냐고 생각하신 겁니다. 농사짓는 집 형편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겠지요. 그렇게 2년을 더 집에 있었습니다.


누나의 친구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다시 이야기해주셨고, 결국 학교에 갔습니다. 막상 가보니 아버지가 걱정하셨던 만큼 돈이 많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점자를 배웠습니다. 누가 읽어주기만 기다리지 않고 직접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광명학교에 가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살았을지 모르겠습니다. 학교가 있는 줄조차 모르던 저에게 누군가 알려주고, 다시 찾아와 가야 한다고 이야기해준 것이 제 삶을 바꿨습니다. 제가 지금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 일하고 달리고,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1993년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습니다. 안마 기술을 배웠지만 당시 남자 안마사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선배들을 자주 찾아다니며 기회를 구했습니다. 취직해서 일하다가 이듬해 대구에 작은 사업장을 차렸습니다. 열심히 했고 이후 부동산 사업 등에서 운도 따라줬습니다. 다행히 일이 잘 풀렸습니다.


운동도 하고 싶었습니다. 헬스장 기구는 위치와 사용법을 익히면 혼자 할 수 있었지만 달리기는 달랐습니다. 함께 뛰어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다 대구의 마라톤 동호회에서 시각장애인과 함께 달려준다는 소식을 듣고 경북대 운동장에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한두 바퀴만 뛰어도 숨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계속 뛰다 보니 10㎞를 달리고 대회에도 나갔습니다. 서울에 와서는 한강에서도 뛰었습니다. 함께 달리는 사람들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더 열심히 살고 싶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장애가 있어서 친구들보다 못한 형편으로 살아야 한다고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입는 옷을 우리 아이들도 입고, 성장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누릴 수 있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로서 제 몫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어느덧 아들은 스물아홉, 딸은 스물셋이 됐습니다. 아들은 대구에서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고 자주 통화도 합니다. 얼굴을 볼 수는 없어도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로서 마음을 나누며 지냅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김재룡 회장이 2014년 대구지부장 당시 활동하던 모습. 2024년 제45회 흰지팡이의날 기념 행사에서 당시 김재룡 지부장이 발언하고 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제공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김재룡 회장이 2014년 대구지부장 당시 활동하던 모습. 2024년 제45회 흰지팡이의날 기념 행사에서 당시 김재룡 지부장이 발언하고 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제공

◆ 닫힌 문 앞에서 한 번 더 말을 걸겠습니다


대구 달서구 지회장을 거쳐 2014년부터 12년간 대구시각장애인연합회 회장을 맡았습니다. 단체 살림은 늘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받는 직책보조비를 7년 동안 후원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코로나 때는 아는 분들과 기업에 도움을 청해 먹을거리 등을 나눴습니다. 모두가 힘든 시기였으니 장애인들은 더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전국의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뒤 집 안에만 머무는 분들이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인터넷이 이렇게 발달했어도 어디에서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알아도 나올 용기가 생기지 않는 분들이 있고요.


가정을 꾸리고 일하며 살다가 갑자기 시력을 잃으면 얼마나 막막하겠습니까. 전화를 걸면 왜 전화했느냐며 화를 내는 분도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한 번 거절했다고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다시 연락하고 찾아가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십니다.


점자를 배우고 보행 교육을 받으면 흰지팡이를 짚고 버스와 지하철을 혼자 타게 됩니다.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기 어렵던 분이 혼자 다니고, 일자리를 얻어 월급을 받기도 합니다. 그때 얻는 자신감은 정말 큽니다. 고마워하는 분들을 볼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시 확인합니다.


이런 분들과 단체가 만날 수 있도록 행정에서도 조금 더 길을 열어주면 좋겠습니다. 연락처를 직접 전달하기 어렵다면, 복지 담당자가 우리 같은 단체가 어디에 있고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안내해주면 됩니다. 저 역시 누나의 친구가 학교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 기회를 몰랐을 사람입니다.


◆ 동등하게 살아갈 기회를 부탁드립니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인식은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도 아직 동정의 시선으로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똑같이 대해주는 것입니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하고 싶은 일도, 가족을 책임지고 싶은 마음도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더 힘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많이 벌든 적게 벌든 내가 일해서 번 돈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재활 교육과 일자리가 이어지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정책을 만드는 분들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더 가까이에서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저도 시골에 있을 때는 광명학교가 있는 줄조차 몰랐습니다. 누나의 친구가 알려주고, 다시 찾아와 학교에 가야 한다고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면 제 삶은 달라졌을 겁니다. 지금도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주기를 기다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찾아가 설득하고, 다시 사회로 나올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우리가 하겠습니다. 정부 행정이 그 만남을 이어주셨으면 합니다.


어린 시절의 저를 다시 만난다면, 곁에서 도와준 사람들이 참 많았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소심해지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은 것도 그분들 덕분이라고요. 이제는 제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집 안에 혼자 계신 분에게 다시 말을 걸고, 함께 밖으로 나갈 길을 찾겠습니다. 그 길에서 여러분도 저희를 동등한 이웃으로 만나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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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서울정치팀장 정재훈입니다. 대통령실과 국회 여당을 출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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