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의병조직 기반 파괴에 나서자
안동 독립지사들과 연대해 만주 망명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속 고난의 길로
영해의병부대서 활약한 박경종부터
함양박씨 3형제·이겸호·박치도·남세혁
군자금 모집이나 신흥무관학교 활동
학교 설립해 민족교육에 헌신하기도
1910년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일제는 한국인을 식민지 노예로 육성하기 위해 민족의식을 말살하는 악랄한 무단 통치와 헌병 통치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제는 의병 전쟁에 참여했던 많은 민족 지사를 폭도로 규정하여 처형하거나 투옥하였고, 반일민족운동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의병 조직 기반을 파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국내에서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독립운동의 주역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일찍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간도를 포함한 만주 등지로 진출해 있었다. 신돌석도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을 때 만주로의 이동 계획을 세웠었다. 영덕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의 망명을 결심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고난의 길로 들어섰다.
박의연·박의열·박의훈 삼형제는 신돌석의진과 만주벌판에서 무장투쟁과 민족교육에 평생을 바쳤다. 영덕군 창수면에 있는 애국지사 함양박공 의연·의열·의훈 사적비.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영덕 사람들은 의병항쟁 초기부터 안동인들과 학문이나 혈연, 혼인 등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활동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안동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잃은 직후부터 만주로의 이동을 서둘렀다. 대표적 인물이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 내앞마을의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 등이다.
이들의 망명길에는 많은 인물들이 함께 혹은 뒤따라 동참하게 되는데, 그들 중 영덕인은 김대락과 사돈관계인 평해황씨 해월헌 문중의 황호, 황만영, 황병일 등과 석주 이상룡의 매부 집안인 무안박씨 박경종 등이다.
박경종은 1911년 1월 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건너갔다. 기록마다 연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때 영해 함양박씨 집안의 박건, 박의열, 박의훈 3형제와 신돌석 의진에서 활동했던 박치도 등이 망명했다. 창수면의 이겸호와 축산 출신 남병구도 뒤따랐다. 그들은 대개 경부선 열차를 탈 수 있는 김천까지 걸어서 이동하였고, 추풍령역에서 열차로 서울을 거쳐 신의주로 간 다음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갔다고 전한다.
이외에도 영덕 사람들의 망명사실을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백하 김대락이 1911년부터 1913년까지 쓴 '백하일기'다. 선생은 만주로 망명 후 석주 이상룡, 우당 이회영과 함께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기 위해 애썼다. 그의 일기 1911년 3월9일자에 이런 내용이 있다.
'영해 반포리에 사는 박종근, 송천 사는 권영구, 송천 사는 권중엽, 평해 정명리 사는 황신걸, 상사리 사는 이근탁이 모두 단신으로 입래하였다. 영해 평해 2인은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하룻밤 묵고 환귀하였다. … 영해 평해에서 계속 이주해 오고 있다.'
이 외에도 그의 일기에는 1911년 이격원, 이유인, 1912년에는 김경국, 박인구, 이성두, 이준우, 1913년에는 남세혁의 이름이 나타난다. 이보다 더 많은 영덕인들이 만주로 망명했다고 여겨지지만 출신지를 일일이 찾아내기 어렵다고 한다.
만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만주에 정착하는 일은 더욱 혹독했다. 백하일기에 따르면 그들은 만주에 정착하기 위해 세 가지 죽을 고통을 극복해야 했다. 첫째는 얼어 죽는 것, 둘째는 굶어 죽는 것, 셋째는 병들어 죽는 것이었다.
◆만주로 간 사람들
영덕 출신의 지사들이 주로 집결한 곳은 요녕성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鄒家街)였다고 한다. 요녕성내의 한인들은 치열하게 항일 독립운동을 수행하였는데 그들의 활동은 대개 비밀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진상을 자세하게 알기는 어렵다. 다만, 훗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등을 추서 받은 몇몇 지사들을 통해 만주에서의 활동 내용을 엿볼 수 있다.
박경종의 본명은 박우종으로 1896년 영해의병부대에 참가하고 1907년 이상룡과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건설하는 등 의병활동을 펼쳤다. 만주로 망명한 후에는 교민들의 생활 안정과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여관을 경영하며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여러 번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로 귀환하였는데 1915년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여했고 1920년 일본군이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경신참변 후 북만주로 이거하여 농업공사를 경영하였다. 이후 한족노동당, 고려혁명당 등에 참여했고 1938년 1월 귀국한 뒤, 4월6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영해 인량 나랏골 출신인 함양박씨 3형제의 활동은 비교적 뚜렷하게 전해진다. 큰형 박건의 본명은 박의연이다. 그는 신돌석 의진의 의병이었다. 1909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만주로 망명했으며 만주 하서구에서 남흥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19년 일경에 피검되어 사형장으로 가던 도중 탈출해 상해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1943년 순직하였다. 둘째인 박의열도 형과 함께 신돌석 의진에서 싸운 인물이다.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1922년 통합 독립군 세력인 대한통의부의 검찰감으로 활동했다. 1924년에는 동원학교를 설립해 군관 양성 및 민족교육에 헌신하였고 1928년부터는 북만주에서 정미소와 농장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영덕군 영해면에 있는 해강 이겸호 의사 기념비. 이겸호 의사는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과 태화학원 설립으로 민족혼을 일깨웠다.
그리고 1930년 말 공산주의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셋째 박의훈은 형들과 함께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 결사대와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하였다. 정부는 삼형제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들의 고향 인량리에 삼형제를 기리는 사적비가 서 있다.
이겸호는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수료하고 서로군정서의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상부의 지시에 의해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요원이 되어 군자금 모집 임무를 띠고 국내로 들어왔다. 같은 해 9월경 경찰에 붙잡혀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된 후 7개월간 구금 상태로 조사받았다. 혹독한 고문에도 끝까지 함구하여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되어 1921년 3월 풀려났다.
영덕군 창수면에 있는 면운재 고택은 이겸호 의사가 선조의 기개를 이어받아 독립운동의 비밀 본거지로 삼고 구국의 뜻을 펼친 곳이다.
이겸호 의사 선조의 고택인 영덕군 창수면의 면운재 고택. 독립운동 본거지로 활용됐다고 전하며 현재 영해면 벌영리에 '해강 이겸호 의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후 1922년 9월 영해에서 태화학원을 설립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였다. 1930년대에 만주에 이상촌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활동하다 발각되어 구금되었고, 1942년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건강 악화로 석방된 후 세상을 떠났다. 선조의 고택인 창수면의 면운재를 독립운동 당시 본거지로 활용했다고 전하며 현재 영해면 벌영리에 '해강 이겸호 의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치도는 만주로 망명 후 의병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하여 조직한 대한정의단 임시군정부에 참여해 항일활동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주로 군자금 및 독립운동가 모집과 무기구입 등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23년 북만주 취원창으로 이주하여 활동하다가 1924년 4월 6일 하얼빈에서 하얼빈 일본총영사 쿠니요시(國吉精保)를 처단했다. 이 과정에서 동지 3명이 피살되었으며 그는 1926년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묘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남세혁은 만주행 뒤 머지않아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19년 3·18 영해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남병구는 대한통의부와 한족노동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1927년 체포되어 신의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는데 이후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많은 이들이 독립을 염원하며 만주로 떠났다. 더러는 돌아왔고, 더러는 독립을 맞이하기도 하였으며, 또 누군가는 서러운 이국땅에서 한 맺힌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름도 없이 싸웠고 마지막도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졌다. 나라 잃은 슬픔과 혹독한 현실 속에서도 조국 광복의 꿈을 놓지 않았던 그들 모두였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이지용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 전문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