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가을이 깊었다. 들녘에서는 곡식을 거두는 손길이 분주하고 나무들은 곱게 물든 잎을 하나둘 내려놓는다. 봄과 여름이 밖으로 뻗어가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한 해 동안 키워온 것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시간이다. 들판이 지난 계절의 수고를 거두어들이는 동안, 나무는 잎을 떨구며 다음 계절을 살아갈 힘을 제 안에 모은다. 움직임은 줄어들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새 성장이 시작되고 있다.
아이의 성장도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우리는 성적이 올랐는지, 영어 단어를 얼마나 외웠는지, 문제집을 몇 권 풀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숫자로 나타나는 결과는 비교하기도 쉽다. 그러나 삶을 오래 지탱하는 힘의 상당 부분은 숫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던 아이가 친구의 말을 끝까지 듣는다. 시험을 망치고도 남의 탓을 하지 않는다. 하기 싫은 일을 참고 끝까지 해낸다.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책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문장 앞에서 다시 생각한다. 이런 변화에는 점수도 등수도 붙지 않는다. 교육이 길러야 할 힘은 이런 곳에서 자란다. 교육에서는 때로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공부를 잘하는 것과 배움을 좋아하는 것은 같지 않고, 높은 점수를 받는 것과 어려움을 견디는 힘을 갖는 것도 같지 않다.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지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힘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논어'에는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君子不器)"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을 한 가지 기능이나 쓸모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오늘의 교육에서도 새길 만하다. 우리는 아이를 너무 일찍 성적과 재능, 적성과 진로라는 몇 개의 항목으로 나누고 있지는 않은가. 영어 잘하는 아이, 수학이 약한 아이처럼 이름표를 붙이는 순간 그 아이의 수많은 가능성을 놓치기 쉽다. 아이는 성적표보다 훨씬 큰 존재다. 공부로 얻는 것은 지식만이 아니다. 어려운 문제 앞에서 인내를 배우고,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겸손을 익힌다. 친구들과 부딪치면서 양보와 화해를 배우고, 실패를 겪으면서 마음을 추스르는 법도 배운다. 이런 배움은 시험에 출제되지 않지만, 삶에서는 끊임없이 시험받는다.
부모의 눈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아이의 성취만 살피기보다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오래 생각했으며 어떤 어려움 앞에서 망설였는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성과는 쉽게 드러나지만, 마음의 변화는 늦게 드러난다. 전보다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의 선택을 감당하려는 태도가 생겼다면 그것도 배움이다. 교육은 변화를 놓치지 않고 아이가 자기 삶을 읽어가도록 지켜보는 일이다.
요즘 아이들은 자신을 돌아볼 틈도 없이 바쁘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으로 가고, 시간이 나면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본다. 무엇인가 하지 않는 시간은 낭비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경험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시간도 필요하다. 하루 동안 들은 말과 읽은 글, 기뻤던 일과 속상했던 일을 마음속에서 정리하는 침묵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나무가 햇빛과 비바람을 제 몸에 스미게 하듯, 수많은 경험도 내면에서 고요히 흡수되어야 비로소 참된 지혜가 된다.
잎을 떠나보내는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나무는 더 높이 자라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다. 바깥으로 뻗어가던 성장을 멈추고 잎을 떨구며 제 안을 정돈한다. 버릴 것은 깨끗이 버리고 남길 것은 뿌리와 줄기 깊숙이 저장한다. 겉으로 보면 멈춘 것 같지만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이듬해 새잎을 틔울 힘은 그 안에 차곡차곡 쌓인다. 아이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을 더 채우고 더 얻을 것인가만 다그치지 말고, 지금까지 배운 것을 어떻게 자기 삶으로 삭여내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성적이 그대로라고 해서 아이가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깊어지고, 타인을 품는 폭이 넓어지고, 실패를 견디는 힘이 자랐다면 그것이 온전한 성장이다.
화려했던 것들이 하나둘 제자리로 돌아가며 세상은 고요해진다. 이 시기에는 아이의 성적표보다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으면 한다. 지난 계절보다 무엇을 더 잘하게 되었는지가 아니라 어떤 생각을 품게 되었고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익어가는 데는 요란한 소리가 나지 않는다. 사람의 내면도 그렇다. 눈에 띄는 성취 뒤편에서 책임감과 인내, 타인을 향한 배려와 생각의 깊이가 조용히 자라고 있다. 교육은 그 보이지 않는 변화를 알아보는 일이어야 한다. 아이가 남들보다 얼마나 앞서 걷고 있는가보다 어떤 사람으로 깊어지고 있는가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교육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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