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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일러스트=김성태 화백 |
“왕이시여! 소신이 앞장서겠습니다."
“부원군, 그 연세에 어떻게? 부원군께서는 여기 남아 후일을 도모해주십시오. 뒷산이 든든히 버티고 있으면 나는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고, 반심을 품은 자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안어대동의 땅은 처음부터 변치 않는 고려의 뒷산이었습니다. 소신이 마지막 남은 목숨을 아껴 앞장서지 않는다면 어찌 저승에서 홍언박과 여랑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홍언박은 왕실의 일원이며 사사로이는 나의 외사촌 형이시니, 왕실에서 신위를 모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랑은 안어대동의 땅에서 태어나 안어대동의 땅에서 나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졌으니, 이 땅에서 기리는 것이 가할 듯합니다. 부원군과 안동부민이 합심하여 여랑의 사당을 세우고 영원토록 그녀를 기려주십시오."
“황공하옵니다. 뜻을 받들겠습니다. 왕의 성은에 여량 또한 편히 잠들 것이며, 그녀의 정신을 안동부민은 영원토록 잊지 않을 것입니다."
#7 왕의 나라
복주성 안에 무거운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홍언박과 여랑의 장례가 끝나자, 왕께서 모든 중신과 토호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복주의 성민들은 모두 분노와 결기로 주먹을 불끈 쥔 채 왕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군사와 함께 총진군하여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바로 세울 것이오! 내가 친히 나설 것이니 준비를 서두르시오!"
“왕이시여. 아직도 곳곳에 적의 잔당이 있습니다, 신중하소서."
“소수의 잔당마저 두려운 자는 사직하시오!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부의 안일과 사욕이었소! 무릇 모든 개혁이 어려운 것은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손 안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 반발하는 까닭이오. 그들은 나라와 백성보다도 오직 자신의 영화만을 소중히 여기는 또 다른 적이오. 눈이 있으면 성안의 백성을 돌아보시오. 동지 섣달 찬바람에 성긴 삼베 무명차림으로 추위를 맞서면서도 백성은 나라를 위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소. 그러나 비단옷을 걸치고 말린 푸성귀 반찬이 거칠다 내치는 이들은 무엇을 했소. 백성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너고, 백성의 입에 들어갈 한 점 고기마저 제 입에 걸어 넣으면서도 백성을 업수이 여기고 착취한 게 그들이오. 더하여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다가 기껏 한 줌 제 이익을 위해 백성과 나라를 송두리째 남에게 바치려는 강도질까지 서슴지 않고 있소. 나는 나서지 않았다 변명하지 마시오! 부화뇌동, 복지부동도 다르지 않은 도둑질이오! 이제 더는 그들에게 틈을 주지 않을 것이오! 단숨에 짓쳐 들어가 적을 물리치고, 그들의 손아귀에 쥔 것을 스스로 내놓게 하여 백성의 삶을 기름지게 할 것이오. 신중하라, 불가하다 간할 자들은 모두 목을 내놓으시오!"
쩌렁쩌렁한 왕의 분노에 무능하고 삿된 중신과 토호들은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왕이시여! 소신이 앞장서겠습니다."
나선 것은 손홍량이었다.
“부원군, 그 연세에 어떻게? 부원군께서는 여기 남아 후일을 도모해주십시오. 뒷산이 든든히 버티고 있으면 나는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고, 반심을 품은 자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안어대동의 땅은 처음부터 변치 않는 고려의 뒷산이었습니다. 소신이 마지막 남은 목숨을 아껴 앞장서지 않는다면 어찌 저승에서 홍언박과 여랑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꺾이지 않을 의지였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랑과 홍언박의 소식에 무빈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싶었다. 왕의 일족이면서도 도성보다는 낙향하여 사랑하는 이와 자연을 벗 삼는 무위와 소요의 삶을 살고자 했던 벗이었다. 귀족의 부패도 볼썽사납고 역겨웠지만, 천년 왕국 신라를 이어 지켜온 500년 사직이 이미 원의 속국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자주와 자존을 되찾으려는 투쟁과 일신(一新)보다는 오로지 부귀영화만을 좇아 지조와 정신을 내팽개친 왕실이고 조정이었다. 차마 하늘과 백성 보기가 부끄러웠다. 다행히 노국공주와 함께 돌아온 왕께서는 원의 속국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주국가의 기치를 세우자 했고, 백성을 위한 나라와 조정을 꿈꾸었다. 홍언박이 귀향을 미루고 왕실과 조정에 남은 것은 왕의 그 꿈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무빈 자신과 여랑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왕께서 그 꿈을 활짝 펼치려는 순간, 진정으로 사랑한 두 사람이 그처럼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니….
무빈은 이를 악물고 칼을 빼들었다. 어서 적을 소탕해 나라를 안정시킨 뒤 같은 희망을 품었던 벗과 그의 님 곁으로 돌아가 그들의 무덤이나마 지키며 소요하리라.
“공격하라! 금수강산 우리 고려의 산천을 짓밟고, 백성을 눈물짓게 한 적의 무리를 모조리 베어라!"
일흔다섯 복천부원군 손홍량이 갑옷을 차려입었다. 비록 하얗고 긴 수염은 바람에 흩날리고, 늙어 쇠약해진 몸은 위태해 보였지만, 두 눈의 안광만은 형형했다. 그가 왕의 앞에서 검을 뽑아들더니 도열한 군사를 향해 높이 쳐들었다.
“왕의 군사들이여, 고려의 군사들이여! 이제 진군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팔을 크게 불어라! 북을 힘차게 두드려 왕의 출진을 알려라.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라! 송야천을 단번에 건너뛰고, 주흘산과 조령을 단숨에 넘어라! 적의 목을 베어 그 피로써 강을 만들자! 도성을 되찾아 왕을 편안케 하자! 홍건의 적을 격멸하자! 고려를 능멸하던 중원의 군사를 몰아내자! 압록강을 건너자! 우리의 옛 땅 만주를 경략하자! 이기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충신과 열사가 우리를 지키리라!"
와――! 와――! 충! 의! 용! 무! 안! 어! 대! 동!
천지를 진동하는 군사와 백성의 함성에 왕은 가슴이 벅찼고, 왕후 노국공주는 뜨거운 눈물을 지었다. 막 출전하려는 순간이었다.
“승전입니다! 승전보를 고합니다!"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채 말을 달려온 군관 한 사람이 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이시여, 승전보입니다! 무빈, 최영, 정세운, 이방실, 안우, 김득배 등의 장수가 20만 군사를 모아 적병 수 만의 목을 베었습니다! 개경 수복 또한 눈앞이니, 왕께서는 근심을 잊으시고 옥체를 편안히 하시어 귀경하시옵소서!"
와――! 장졸과 백성의 함성이 다시 하늘을 울렸다.
“부원군, 이미 승전보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원군께서는 이곳에 남아 나라의 든든한 뒷산이 되고, 등뼈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무빈 등이 그리하였다면 소신은 왕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이곳은 실로 왕의 땅입니다, 나라의 땅입니다, 안어대동의 땅입니다. 나는 이 땅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할 것입니다!"
“실로 가당하신 분부이옵니다. 다시 안어대동의 이름을 찾고, 대도호부의 영광을 얻었으니 자손만대 충절의 마음으로 나라의 반석을 다질 것입니다. 고려 왕 만세! 왕후마마 만세!"
만세! 만세! 안동부민의 만세가 그칠 줄 몰랐다. 왕은 한참을 기다려 부민의 만세소리가 잦아들자, 다시 손홍량을 돌아봤다.
“홍언박은 왕실의 일원이며 사사로이는 나의 외사촌 형이시니, 왕실에서 신위를 모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랑은 안어대동의 땅에서 태어나 안어대동의 땅에서 나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졌으니, 이 땅에서 기리는 것이 가할 듯합니다. 부원군과 안동부민이 합심하여 여랑의 사당을 세우고 영원토록 그녀를 기려주십시오."
“황공하옵니다. 뜻을 받들겠습니다. 왕의 성은에 여랑 또한 편히 잠들 것이며, 그녀의 정신을 안동부민은 영원토록 잊지 않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안동부민들은 들으라!"
사위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내가 안동을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기는 했으나, 이 땅은 왕의 땅에 진배없음을 알린다. 이미 고려의 반석이 되었던 땅, 나 또한 이곳에서 고려 중흥을 꿈꾸었다. 이곳을 도성으로 삼아 천대 만대 복되고 편안함을 누리고 싶다만, 이제 고려는 압록강 넘어 우리의 고토를 경략해야 할 것이니 북쪽의 개경을 도성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안동부민들이여 잊지 마라! 이 복되고 편안한 땅은 영원히 왕의 땅임을!"
안동부민들은 모두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지었다. 왕의 땅, 나라의 반석으로 칭해지는 영광이라니……. 손홍량이 나섰다.
“왕이시여. 승전이 눈앞이니 잠시 더 쉬시어 옥체를 편히 하소서."
“아닙니다. 뜻을 세웠을 때 나설 것입니다.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친히 고려의 군사와 함께할 것입니다. 정히 아쉬우시면 작은 소반에 건국주와 안동소주를 한 잔씩 채워 주십시오. 내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그 뜨거운 열기가 식기 전에 개경을 되찾을 것입니다."
“여보게들. 어서 술과 잔을 준비하게."
손홍량이 받쳐 든 소반 위의 술잔을 단숨에 비운 왕은 칼을 하늘로 높이 치켜들었다.
“자! 출진하라!"
왕의 깃발을 앞세우고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기치창검이 햇볕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도록 번쩍거렸다. 안동의 부민들은 차전을 만들어 손홍량의 지휘에 따라 힘차게 허공으로 치솟으며 왕의 승전과 안녕을 기원했다.
글 = 김정현<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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