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철희의 세상풍경] 무너지는 주거 사다리

  • 윤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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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2-02 06:00  |  발행일 2026-02-02

집은 욕망의 존재다. 특히 한국인은 더 그렇다. '내 집'에 대한 집착은 세계적으로 유별나다. '집 없는 설움이 가장 힘든 세파(世波)'라는 말이 있을 만큼 한국인은 필사적으로 내 집 갖기에 매달린다. 집은 단순히 주거공간을 넘어 자산의 주춧돌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내 집을 자산 형성의 출발점이면서 '최후의 안전망'으로 여긴다. 집은 우리 삶의 가치관과 욕망이 응축된 상징인 셈이다.


한국인의 내 집 갖기에 불을 붙인 게 전세 제도다. 전세는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 주거와 사금융이 결합한 한국만의 독특한 임대차 제도다. 젊은 부부가 월세나 소형 전세에서 출발, 몇 년마다 더 큰 전세로 옮기면서 종잣돈을 마련, 내 집을 갖는 게 하나의 교범이다. 주거비를 아끼며 종잣돈을 불릴 수 있는 한국 특유의 자산 축적 메커니즘으로, 서민에겐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한 셈이다. 집주인 역시 전세금을 활용해 얻는 수익이 쏠쏠찮다. 모두에게 '윈윈 구조'이지만, 내 집 마련을 바탕으로 계층 사다리에 올라탈 젊은 서민에게 더 유익한 게 사실이다.


서민의 주거 사다리인 전세가 월세에 밀려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전세 퇴장에는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다. 전세 사기는 제도의 신뢰 붕괴를 가져왔다. 이른바 '깜깜이 계약'으로 세입자를 등치는 악질적 수법이다. 이는 청년층이 집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 촉매 역할을 했다. 여기다 서울의 집값 폭등은 청년층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기는 한편, 주거 패러다임을 소유에서 경험, 이용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시킨다. 집주인 역시 낮은 금리, 고물가 구조 탓에 월세를 선호하는 상황이다.


정부의 대출 옥죄기는 전세 퇴조에 결정타다. 서민 주거안정을 위한 전세 대출 확대가 역설적으로 서울 집값 상승에 불을 지폈다.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갭투자'가 쉬워진 탓이다. 은행에서 세입자 대신 전세 보증금을 대주니 갭투자는 최고의 '집테크'인 셈이다. 집값이 오르지 않는 게 더 힘든 환경이다. 정부가 갑자기 전세 폐지론을 들고 나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토교통부 장관은 물론, 한국은행 총재까지 나서 집값 안정 방안으로 '월세 시대'를 재촉하는 형국이다.


전세의 퇴조는 '주거 사다리'가 무너진다는 측면에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월세는 젊은 층과 서민경제에 치명타다. 무엇보다 주거비용이 많이 든다. 국가데이터처 조사 결과, 월세 가구의 소비지출 대비 주거비 비율(21.5%)이 전세 가구(8.5%)의 2.5배에 육박한다. 더욱이 월세는 소멸성 지출이다. 서민의 자산 축적은커녕, 생활비 부담만 가중된다. 앞으로 미국이나 유럽 대도시처럼 소득의 30~50%를 월세로 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경제 역동성을 떨어뜨리고, 가뜩이나 줄고 있는 중산층이 더 얕아지고, 계층 간 양극화, 사회 불안이 더 심해질 우려가 크다.


그렇다고 임대차 시장에서 월세로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다만 전세 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월세 전환의 가속화를 조금이나마 늦춰보는 게 좋을 듯하다. 일본도 월세 부담이 사회 문제로 비화하자, 그 대안으로 우리의 전세제도를 연구한다. 그렇다면 정부나 주택 관련 기관이 월세 전환을 재촉할 게 아니라, 전세를 합리적으로 운용할 방안을 모색하는 게 진정한 민생정책이 아닐까 싶다.


우리 고유의 '집 테크' 전세


정부 전세대출 옥죄기 탓에


전세 퇴조, 월세 득세 현상


서민의 주거 사다리 무너져


전세 합리적인 운영안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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