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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진군 기성면에 있는 황여일의 별당 해월헌. 1985년 경북도문화재 자료 제161호로 지정됐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
#1 - 경상도 울진 사동(沙洞) 앞바다. 해월(海月)은 집을 나와 파도소리를 좇아 걷는다. 푸른 하늘도 물빛도 지워진 캄캄한 바다 앞에 선다. 고깃배도 바다새도 지금은 육지에 깃들어 조용하다. 파도소리에 오래 귀를 씻는다. 잠시 후 정면에서 어둠이 벌어진다. 불덩이 하나가 솟아오른다. 너무도 가볍게 떠올라 이내 저를 뱉어낸 거친 바다를 내려다본다. 달이 나오자 바다가 생기고 숨어 지나던 밤하늘의 구름이 드러난다. 젓대(대금)소리가 들린다. 구름이 달을 스쳐간다. 흐느끼는 가락이 저 구름을 피어내고 있는 것만 같다.
‘달을 마주보며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러러 그 빛을 즐기며 살아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달을 진정 흠모하는 사람은 달과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달은 깊은 바다에서 생겨나지만 결코 젖는 일이 없고 어둔 하늘을 높이 떠 건너가는 것이다. 만물의 밤을 비추는 것이다.’
해월은 바다와 달을 등지고 돌아선다. 그의 뒷모습이 달빛에 환하다.
‘만리 푸른 바다 흰 비둘기 우연히 인간의 세계로 때를 묻히러 들어가네’
출사를 앞둔 사내의 마음은 그러할까. 임진년 전쟁이 나기 몇 해 전, 해월이 서른에 고향 울진을 떠나며 지은 시다.
난세였다. 그 한 사람이 지낸 세월은 아니나, 칠년 전쟁은 해월이 공직에 몸담은 30년 시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전쟁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의 삶을 뒤흔든다. 함경도 고산에서 찰방으로 있으면서 전쟁을 맞이한 해월은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으로 울산 도산성 전투에 참전한다. 시문에 빼어난 문관이라고 해서 창칼이 불꽃을 튀기는 전장을 먼 산 쳐다보듯이 있을 수는 없었다. 시상(詩想)을 찾아 풍광을 더듬던 눈은 전투에 이로운 지형지물을 살피고, 붓을 들어 한 번에 시를 써내려가던 손은 혹한에 얼어 터졌다. 영하의 날씨에 맨살을 보라고 내놓으면 누구의 살이 얼지 않고 배기겠는가. 해월에게 어려운 일은 그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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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 입구에서 바라본 해월헌. |
1598년 10월, 해월은 사헌부 장령으로 발령을 받아 조정으로 불려온다. 전장에서 병을 얻는 바람에 한 달이 걸려 왕을 대하게 된 해월은 엎드려 사직을 청한다.
“불초 소신이 시골에 있었는데 뜻밖에 본직(本職)의 명령이 갑자기 이르니 놀라고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성품이 본래 어리석고 용렬하여 걸핏하면 남의 비방을 삽니다. 그리고 신의 얼굴에 종기가 나서 1개월이 지난 지금에야 올라와 사은숙배하니 신이 명을 지연시킨 죄가 매우 큽니다. 체직시키라 명하소서.”
당시 이 자리에 있던 사관은 해월의 인물평을 다음과 같이 실록에 남기고 있다.
‘글을 잘 짓고 사람됨은 어리석지만 용기가 많다.’
이러한 세간의 평가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해월은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만난 백호 임제와 깊이 교분을 나누었다. 한번은 임제의 소설 원생몽유록에 발문을 쓴 일이 있다. 이 책은 단종의 폐위와 사육신의 억울한 죽음을 다루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피하고 꺼리는 일을 해월이 선뜻 맡고 나선 것이다. 보통사람이라면 그런 일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이니 ‘해월은 글을 잘 짓고 어리석고 용기가 많은 자’로 입에 오르내리기에 충분했다.
왕은 사직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직은커녕, 명나라로 가는 사절에 발탁되어 해월은 보름 뒤 연경(燕京)으로 떠나야 했다.
#2 - 전쟁의 끝 무렵, 막바지 힘을 끌어와 영호남에 남아있는 왜군을 몰아내야 하는 순간이었다. 명나라 지원군과 함께 대규모 작전이 계획돼 있었다. 이때 중대한 일이 발생한다. 명나라에서 파견된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사건이 그것이다. ‘조선의 왕은 백성을 핍박하고 주색에 빠져있으며, 왜국과 작당해 명나라를 쳐서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한다’는 누명이었다. 명 조정의 내부갈등에, 전란을 겪고 있는 조선이 어이없는 제물이 되고 만 것이다. 파병군이 곧 철수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지휘를 맡고 있던 명의 장수들이 하나둘 소환 당했다. 무엇보다 왜군에 시달리고 있는 조선이 이번에는 명과 적대관계에 놓일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었다.
명 황제에게 해명하기 위한 변무사(辨誣使)가 연경으로 파견되었다. 사신이 돌아오기도 전에 잇따라 사신을 들여보내고 있었지만 매번 흡족한 인물을 구하지 못했다. 사안이 막중하다보니 대신들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나서지를 않았다. 일을 수월히 해내지 못했을 경우 돌아올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 사이 들리는 소식은 정응태의 이간질이 더 늘었다는 것이요, 오해가 복잡하게 꼬여간다는 것. 조선의 입장에선 애가 타는 소식뿐이었다. 왕은 황제에게 죄를 지었다며 업무를 중단하고 근신하기에 이른다.
세 번째 변무사절 책임자로 지목된 우의정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역시 자신도 문장에 능하지 못하다며 거듭 고사하는 상황이었다. 교활한 누명을 시원하게 벗겨낼 만큼 절실하고 곡진한 문장을 구사할 줄 아는 인물이 필요했다. 논단 끝에 월사(月沙) 이정구(李庭龜)를 부사로, 해월이 서장관으로 임명된다. 왕과 조선의 운명이 이들 세 사람에게 맡겨진 것과 같았다. 해월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행장을 풀기도 전에 도로 꾸려야 했던 당사자는 또 얼마나 황망했을까. 그러나 해월은 임진강을 건너며 십 수 년 전 출사할 때와 같이 시 한 수로 마음을 다잡는다.
강물은 고요히 흘러가는데
어찌하여 나그네의 마음은 괴로운가
당시엔 앞날을 위한 계책이 없었기에
칠년 동안 전란이 있었네
왜적 때문에 사람들 오래 헤어지니
산천도 절로 신명이 없구나
석양에 뱃길을 재촉하며
갑 속의 칼 잡고 맑은 하늘에 외치네
의주에 도착한 사절은 이정구의 병으로 지체된다. 마침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려는 찰나, 수군이 노량에서 크게 이기고 왜군이 물러갔다는 승전보를 듣는다. 길고도 참담했던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하루에 꼬박 60∼70리 길을 가서 두 달여 만에 연경에 도착한다. 이후로 삼 개월을 연경에 머물며 오해를 풀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관청마다 진정서를 올리고, 길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날도 셀 수 없었다. 관복 입은 사람이 멀리서 나타나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했다. 그런 노력 끝에 명나라 조정의 오해는 풀리고, 정응태는 죄를 받아 평민의 신분으로 떨어진다.
연경을 떠나기 전 황제가 해월에게 물었다.
“그대는 만리기상(萬里氣像)이 있구나. 조선은 삼천리강토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만리정기(萬里精氣)를 타고나 명(明)을 치려드는가?”
황제가 농으로 거는 말이지만 대꾸를 잘못했다가는 어디로 불똥이 튈지 모를 일이었다. 이런 식의 농담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항복과 이정구가 함께 식은땀을 흘리며 해월의 대답을 기다렸다. 해월이 눈빛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예, 신의 고향 울진에는 만리창해(萬里滄海)가 있습니다.”
해월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황제는 무릎을 치며 웃었다. 해월의 목소리는 조금의 떨림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3 - 연경에 들어갈 때는 천지가 눈으로 덮여 희었는데, 귀국하는 길에 보니 버들이 푸르게 변해 흔들리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왕의 누명도 벗었다. 시절은 봄이다. 하지만 아직 내 땅의 봄은 아니었다. 조선의 관리 해월에게는 전후 수습의 고단한 업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나라 역사를 읽다가 기이한 경관 보기를 바랐건만
오늘 산해관에 도착하고 보니 도리어 슬퍼지네…
희게 칠한 성가퀴는 진나라 때와 똑같건만
웅장한 성벽은 어찌해 송나라가 망할 때 무너졌던가
재주 없어 하찮은 벼슬이나 얻기를 바라노니
먼저 백성들 마음 굳건히 하면 오랑캐는 절로 막을 수 있네
1615년, 해월은 동래부사로 부임했다. 왜란의 피해가 극심한 지역이었다. 해월은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고 선비를 모아 교육을 장려했다. 임기가 끝나 사표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동래의 백성들이 해월의 임기를 연장해 달라는 청원을 조정에 올렸다. 사양하던 해월은 하는 수 없어 동래에서 일 년을 더 있다가 1618년 8월에 물러나왔다. 울진 만리 푸른 바다로 돌아온 해월은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 아들 중윤이 관직에 나섰고 해월의 뒤를 이어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중윤에게 관리로서의 자세를 일러주기도 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빼앗겨 학문을 깊이 파고들지 못한 자신의 후회를 내비치며 한편 경계를 삼도록 했다. 퇴계(退溪)의 수제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문하에서 수학했던 해월은 조금 늦게 태어나 퇴계의 밑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다고 하였다. 젊은 날에 지은 별당 해월헌(海月軒)을 만귀헌(晩歸軒)이라고 고쳐 부르고, 해월은 그곳에서 마지막 날까지 저술에 힘썼다. 1622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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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일 극작가 |
#Story Memo
울진에서 태어난 해월(海月) 황여일(1556∼1622년)은 부친인 창주 황응징에게 글을 배웠다. 그의 부친은 임진왜란의 영웅 정담 장군을 어릴 때 가르쳐 대성시킨 스승이다. 이러한 학덕이 높은 가풍은 해월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천부적인 재능과 가문의 학풍이 더해 당시 최고 엘리트계급이었던 퇴계 문하 학봉 김성일의 제자가 된다. 특히 해월은 학봉의 중형(仲兄) 되는 귀봉 김수일의 딸과 혼인해 중앙 관직으로 출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나자 해월은 함경감사 윤탁연의 종사관이 된다. 1594년 형조정랑이 되고 곧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으로 행주대첩에서 많은 공을 세운다. 1596년에는 이순신 장군과 국사에 대해 논한다. 1598년 명나라와 국교가 위태롭자 백사 이항복, 월사 이정구를 정사(正使)로, 해월은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외교에 공을 세우고 ‘만국공여지도(萬國供輿地圖)’를 가져온다. 영남일보의 ‘해월 황여일 스토리’는 그가 명나라로 들어가 천부적인 문학적 재능으로 외교에 공을 세운 일화를 주요 모티브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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