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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예천읍 고평리에 있는 정충사의 전경. 내부에는 약포 선생과 관련된 유고와 문서들이 보물 제494호로 지정돼 보관되고 있다. 사진=손동욱기자 dingdogn@yeongnam.com |
성석제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은 조선 중기 대학자이면서 명재상으로 유명하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극심한 당쟁 속에서도 초연하고 지조가 곧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직전 대명관계에 교두보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선조 27년(1594) 우의정에 오른 그는 성웅 이순신, 의병장 김덕영 등 뛰어난 장수를 천거하기도 했다. 또한 옥중의 이순신을 신원(죄가 없음)하는 상소를 올려 죽음을 면하게 한 일화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약포 정탁 스토리는 정탁과 두사충의 명당 일화, 그리고 이순신의 목숨을 구한 스토리를 주요 소재로 삼았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 명나라의 총사령 이여송은 두사충(杜師忠)이라는 지리참모를 대동하고 조선 땅에 들어왔다.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라는 직함의 지리참모는 전장의 지리와 형세를 분석하고, 승리를 할 수 있는 진세를 펼 수 있는 장소를 선정하도록 조언하는 직임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풍수지리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1593년 1월 평양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면서 승기를 잡았으며, 여세를 몰아 개성까지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두사충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명군은 패주하는 일본군을 얕잡아보고 승리를 서두르다가 한양 근교의 벽제관(碧蹄館) 싸움에서 패배를 당했고, 이여송은 말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
벽제관 패전의 원인을 묻는 과정에서 군진을 잘못 전개한 탓으로 돌려 두사충을 참수에 처하자는 의논이 장수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때 조선 조정을 대표하여 명군을 맞이했던 접반사 약포 정탁이 두사충의 능력을 아까워한 나머지 힘을 다해 죄를 감해 줄 것을 청원하여 두사충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두사충은 생명을 살려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정탁에게 천하명당인 집터(陽宅)와 묘터(陰宅) 하나씩을 잡아주며 말했다.
“대감께서 제가 정해드리는 집터에 집을 지으시면 후손 중에 대감과 같은 정승이 반드시 셋은 나올 것입니다. 대감이 돌아가신 후 무덤(身後之地)이 될 곳은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로서 구슬이 꿰어진 줄 가운데의 옥 모양의 천하명당입니다.”
후일 정탁은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에 있는 집터를 찾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만인지상이라는 정승이었지만, 기밀을 유지할 겸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평복 차림으로 구종 하나만을 데리고 갔을 뿐이었다. 문경새재를 넘어 주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정탁은 주막 주인인 노파에게 요즘 문경지방의 민심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노파는 “지금 문경 백성들은 정탁이라는 한양의 고관대작이 하필이면 이 먼 곳까지 와서 집을 짓는다 어쩐다 하여 노역에 끌려나가 시달리지나 않을지 크게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정탁은 구종에게 말머리를 돌리게 했고, 집터를 포기한 채 한양으로 돌아갔다.
두사충이 조선의 팔대명당 가운데 하나라며 잡아준 묘터는 지금의 문경시 동로면에 있었다.
1599년 일흔네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의 묘소를 살펴본다는 이유로 고향에 돌아온 정탁은 병이 생겨 다시 한양 땅을 밟지 못했다. 병세에 어느 정도 차도가 있자, 정탁은 말을 타고 구종 하나를 데리고 예천 고평리 집에서 멀지 않은 문경 땅으로 향했다. 두사충은 평생 정탁을 따라다니던 구종에게 “문경 동로의 생달리에 가면 묵은 반송이 한 그루 있는데, 그 곳에서 여차여차한 방향으로 백 걸음 이내의 곳”이라고 위치를 가르쳐 준 참이었다. 일단 목적지 가까운 곳에 도착한 구종은 반송 아래에 앉아 잠시 쉬게 되었다.
“천하명당이라는 그 자리가 도대체 어느 쪽이냐?”
정탁이 묻자, 구종은 여기서 얼마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그런데 구종이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말이 미쳐 날뛰며 발길질을 하는 바람에 구종은 말굽에 차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이에 정탁은 말을 죽여 소나무 밑에 묻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 곳은 내가 묻힐 터가 아니로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까지도 문경 땅 연주패옥의 명당자리는 정확한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전국 풍수지리가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후일 두사충은 조선에 귀화하여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가로 명성을 떨쳤다.
정탁은 공자와 주자, 퇴계에 이르는 정통 유학의 계승자로서 경학에 통달한 선비면서도 풍수에 관심이 있었다. 또 천문과 지리, 병법에 능통한 실천적인 학풍의 소유자였다. 지금의 예천군 용문면 하금곡리인 금당실의 외가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에 어머니 한씨를 여의고 열한 살에 아버지를 따라 조상 대대로 세거해 온 안동의 가구촌으로 갔다. 열세 살부터 산법(算法)과 천문 공부에 골몰했고, 삼촌에게 경학을 배웠으며 사서를 섭렵했다. 열일곱 살 때 당대의 거유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정통 성리학을 배웠다. 스물일곱 살 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서른세 살이 되던 해 겨울 문과에 급제하여 비로소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첫 벼슬로 그가 임명된 곳은 교서관이었다. 교서관은 경서의 인쇄나 국가 제사의 향과 축문, 각종 인장의 전각(篆刻)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사람들은 정탁을 두고 장차 정승이 될 신진 인재가 뜻밖에 한직에 배속되었다고 했지만, 당사자는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평소 남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던 당시의 영의정 이준경이 그런 정탁을 보고는 “이 사람은 기이하게도 암룡(雌龍·자룡)의 관상이니 나중에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벼슬길 초년에 정탁은 승진이 그리 빠른 편이 아니었다.
서른여섯 살이 되던 해 진주에 교수로 부임했을 때 정탁은 학문과 명성에서 스승인 퇴계와 쌍벽을 이루던 남명 조식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로써 정탁은 성리학의 진전을 이어받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퇴계의 학문과 실천궁행의 도리를 설파하던 남명에게서 동시에 배운 몇 되지 않는 제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남명은 정탁이 서울로 돌아갈 때 “빠른 말보다는 소를 끌고 가는 마음으로 평생을 일관하라”는 가르침을 주었고, 정탁은 타고난 겸허함에 신중함을 더해 꾸준히 학자와 관리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마흔 살에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의 청요직에 들어갔다. 마흔한 살에는 예조정랑, 홍문관 부수찬,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중요한 건 그 무렵부터 정탁이 임금의 지근거리에서 삼십여 년간 경연(經筵)에 참여하여 임금의 학문과 정책 결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생 후반기에는 벼슬이 순조로워 6조 판서 가운데 예조, 형조, 이조, 병조 등 다섯 조의 판서를 지냈다. 특히 인사를 관장하는 이조판서를 세 번이나 역임했다. 생전에 좌의정과 우의정에 모두 임명되었고, 사후에는 영의정이 증직되었다.
정탁은 이조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다른 자리에 있을 때도 거듭하여 국가의 동량이 될 만한 이순신 같은 인재를 조정에서 등용하도록 적극적으로 진언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곽재우,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공을 세운 김덕령, 사명당 유정, 한백겸, 박명신 등 출중한 인재를 추천한 사람이 정탁이었다. 특히 1597년 3월 원균의 상소와 일본군의 모략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압송되어 나라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로 추국을 당하게 되었을 때 이순신에게 걸려 있는 혐의가 무고임을 변론하고, 전공과 능력을 감안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도록 극구 변호했다. 애초에 이순신을 국가를 지킬 인재로 천거했던 정탁이 이순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2차 국문을 저지함으로써 조선은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탁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백성들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될 기미를 보이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1600년 봄 일흔다섯 살의 나이에 좌의정에 임명되었다는 교지가 예천의 집까지 내려오자, 이전에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을 때처럼 간곡한 사직의 글을 올렸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무능하고 덕이 없으면서도 분에 넘친 은혜를 받은 신하로 낮추어 말했다. 하지만 성품이 온화하여 적이 없으며,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시비곡직을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옳은 방향을 찾아나간 인물이라는 평가가 훗날 정적들이 집필한 사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거듭된 사직소를 올려 마침내 사퇴 윤허를 받아 명예직인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일흔여덟 살에 영중추부사, 봉조하 등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 무엇보다도 고향과 주변의 산천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안식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때 마음의 풍경은 만년에 그가 쓴 시에 잘 드러나 있다.
고평의 푸른 들
해마다 아름다운 풀이 꽃을 피우고
다시 놓은 긴 다리가 있어
밝은 노을 떨어져 앞을 환히 비추는구나
정탁은 여든 살이 되던 해 고향 집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 부고가 전해지자 임금은 몹시 슬퍼하며 사흘 동안 조회를 폐했고, 승지를 보내 부의를 내렸다. 한양의 백성들은 가게를 철시하고 거리에 나와 슬피 울었다. 이듬해 예천 남면 위라곡 언덕에 장사를 지냈으며, ‘청백하게 절개를 지켰으며 덕을 쌓음에 게으르지 않다’는 의미의 ‘정간(貞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정탁이 살았던 예천 고평리의 집과 위라곡의 무덤이 과연 명당일까. 그건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겸손과 남모를 실행으로 평생을 일관한, 푸른 풀밭을 적시는 숨어 있는 샘물 같은 존재였던 정탁은 자신이 살았던 곳과 죽어 묻힌 곳을 명당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고평리 마을에서 정탁의 호 ‘약초을 기르는 밭(藥圃)’ 같은 집 앞 푸른 텃밭에 샘물을 뿌리고 있는 촌로를 만났다. 그는 길을 묻는 내게 상추와 들깨를 마음껏 뽑아가라며 웃었다. 들깨 향, 상추 맛이 그토록 향긋하게 느껴진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공동기획: 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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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바라본 정충사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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