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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정 종택 전경.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 ‘산운마을’에 있다. 6·25전쟁 때 모두 소실되고, 사당만 남아있던 곳을 다시 복원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
안동의 남쪽, 의성은 마늘냄새보다 더 진한 시향(詩香)을 숨기고 있다. 선조, 광해군, 인조 대를 살았던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1570∼1629)이 태어나고 돌아간 곳이다. 그는 명나라와 일본, 그리고 유구국(현재의 오키나와) 사람들이 시를 써주기를 간청할 만큼 빼어난 글로벌 시인이었다.
北學淵源應有自(북학연원응유자)
東歸衣鉢豈無傳(동귀의발기무전)
龍門餘韻如將理(용문여운여장리)
爲擬煎膠續斷絃(위의전교속단현)
북학(北學)은 당연히 그 뿌리가 있을텐데/조선에 온 의발은 어찌 전해진 게 없을까/등용문(성인이 되는 문)의 여운이 장차 정리되어/아교를 녹여 끊어진 거문고줄 이어야 하리.
-독서유감(讀書有感)중에서
이 시는 이민성이 서장관으로 두 번째 명나라에 갔을 때인 1623년 11월 옥하관(북경에 있던 조선 사신의 숙소)에서 책을 읽다가 쓴 것이다. 이를 읽은 중국의 지식인들이 놀라며 말했다. “이태백이 살아 돌아온 것 같소. 우린 선생을 이적선(李謫仙)이라 부르겠습니다.” ‘독서유감(讀書有感)’에는 ‘북학(北學)’이란 말이 나온다. 조선 실학사상의 핵심인 북학이란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박제가(1750∼1805)가 ‘북학의(北學議)’를 쓴 1778년 이후였다. 무려 150년 전에 이민성이 이 말을 시에 쓴 셈이다. 물론 북학의 의미는 이후 북학자들이 말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슬로건을 담은 것은 아니다. ‘맹자’에 나오는 말로, ‘중국에 가서 공자의 근본 가르침을 배우는 일’을 가리킨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을 두 차례 다녀온 외교관이었던 이민성은 사실상 조선 실증주의 정신을 이끈 선구자격인 지식인이었다.
경정은 1천266수의 시를 남겼다. 당시 산동에서 문장가로 유명했던 오대빈(吳大斌)은 그의 시를 읽고 이렇게 말했다. “이토록 구슬같은 언어를 뱉는 이라면 심장 속에 옥재(玉材)를 품고 있을 것이다. 우리 중국에 이같은 시인이 몇 있겠는가? 그가 앞에 있다고 감히 치켜세우는 말이 결코 아니다.” 화가 김시, 명필 한석봉과 함께 조선 중기의 3절(絶)로 손꼽히는 문장가 최립(1539∼1612)은 이민성의 시 ‘타맥사(打麥詞·보리타작 노래)’를 읽다가 “마음이 바쁘고 겨를은 없어 굶주림과 목마름도 생각뿐/전대에 찬 밥그릇엔 흙만 가득하네(心忙不暇戀飢渴 底壺半成土)”라는 구절에 이르러, 이렇게 부르짖었다. “글의 힘이 아름답고 튼튼하니 요즘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기운이 아니다. 옛 사람의 문집에서도 흔하지 않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이 시를 읽고는 “경정의 문장이 이 경지까지 갔구나”하고 탄복을 했다. 한성부 판윤을 지낸 허적(水色 許積·1563∼1641)은 “나같은 사람은 그 중 한 구절도 흉내낼 수 없다”며 격찬했다. 이 대시인은 당대의 명성이나 활약, 그리고 놀라운 시적 재능을 생각할 때 이상하리만큼 외면당한 채 묻혀 있다.
경정의 시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외교관의 견문에 바탕한 합리주의와 실증정신이 배어있는 점이다. 보이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감각화하는 모던한 기풍의 시를 많이 내놓았다. 중국에서 낯선 외국인을 보면서 그 모습을 시로 남겼다. 이슬람인(回回國人)을 보고나서는 ‘頭全疋帛 垂耳兩重環(과두전필백 수이양중환·머리를 온통 비단으로 칭칭 감고, 양쪽 귀에는 무거운 귀고리를 늘어뜨렸네)’이라고 표현했다. 감아올린 터번 복장을 묘사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중국 황실에 옥을 바치고 받은 돈으로 시장에 가서 비단을 사서 돌아가는데, 남는 돈이 별로 없어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태국인(暹羅人)에 대해선 이렇게 읊는다. ‘袈裟惟蔽體 拜尙隨(가사유폐체 배기상수려·승려복만으로 몸을 가리고 무릎 꿇어 절을 하는데 배가 바닥에 닿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병합 당한 유구국(오키나와현)의 사신을 보고서는 이렇게 묘사했다. ‘華嶼乾坤別 箕封兩露同(화서건곤별 기봉양로동·중국의 섬인 대만과는 하늘과 땅처럼 다른 나라이고, 기자국의 후손으로 중국 제후국 위상을 지닌 조선과 비슷해 보인다)’. 이민성은 유구국 사람들이 우리와 닮았는 데도 말이 통하지 않는 점을 애석해하고 있다. 또 낙타에 대해선 ‘峯起肉是鞍 頭長頸如鶴(봉기육시안 두장경여학·봉우리처럼 솟은 살덩이가 안장과 같고, 기다란 목은 학과도 같다)’이라고 묘사하고, 코끼리에 대해서는 ‘露牙森可 伸鼻縮還奇(노아삼가파 신비축환기·드러난 어금니는 커서 무섭고, 펴진 코는 말려들어 희한하다)’라고 읊고 있다. 또 북경에서 그는 지진을 만났다. ‘기운이 산하를 뒤흔드니 하늘 기둥이 부러지고, 담벽을 뒤흔드는 소리에 나무들이 쓰러지네’. 이런 세밀하고 성실한 ‘리포트’들은 그의 사유를 실증적인 방향으로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관념론을 지향하는 예술과 공허한 철학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에 이런 시들을 꾸준히 발표했던 건, 그가 새로운 문명사의 도래를 무의식적으로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민성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16세기 말과 17세기 초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광해군 대의 혼란과 인조반정이 있던 격동의 시절이었다. 어려서부터 시를 좋아했던 그는, 19세 때 퇴계의 핵심 제자인 학봉(鶴峯) 김성일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는다. 학봉은 이민성의 부친인 학동(鶴洞) 이광준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의 호가 ‘경(敬)의 집’이란 뜻인 ‘경정(敬亭)’이 된 것은 퇴계가 그토록 강조하던 공경의 정신을 평생 실천하고자 하는 다짐이었을 것이다. 학봉은 당시의 많은 학자들처럼 사변론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실증적 흐름을 받아들이려는 유학자였다. 이런 스승의 태도가 경정의 생각을 유연하게 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23세의 경정은 강릉부사인 부친과 함께 동해안에 있었다. 그는 상황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한밤중 장군 막사엔 달이 차갑고, 병영에는 수만개의 밥짓는 연기가 내려앉네’.
1597년 정시문과 갑과에 급제한 그는 승문원의 관리로 벼슬을 시작한다. 5년 뒤인 1602년(33세)에 세자 책봉을 청하는 사절단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로 간다. 이때의 경험은 경정의 세계관을 개안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듬해에는 강원감사인 아버지를 따라 금강산 등반을 한다. 이때 탄은 이정(세종의 현손·화가)과 강원도 군수이던 석봉 한호, 간이 최립도 동행했다. 경정은 이때 이정에게 묵죽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2년 뒤인 1605년(36세) 왕은 그를 이조전랑으로 발령내려고 했는데, 반대 당파인 정인홍이 방해하여 제주점마어사로 밀려났다. 경정은 “이번 길에 남명(南冥·남쪽의 큰 바다)에 발을 씻고, 한라에서 옷을 털 것이니 좋은 일입니다”하고 껄껄 웃었다. 그해 겨울 한성으로 돌아오자, 전쟁 이후 폐지됐던 과거가 재개됐다. 경정은 여기서 세 차례나 수석으로 합격했다. 대제학을 지낸 이호민(1553∼1634)은 “지금의 문형(文衡·저울로 물건을 달 듯 글을 평가하는 자리를 가리키는 말로, 대제학 벼슬을 일컬음)은 바로 이 사람”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해 겨울 그는 영남의 숨은 대학자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을 모시고, 의성의 빙계(氷溪)계곡으로 들어온다. 그곳에는 빙계서원(춘산면 빙계리)이 있다. 빙계서원은 원래 남대천 상류인 장천에 있었는데, 이민성의 부친 이광준이 1600년에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 민성은 여기서 주역을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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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정 종택의 사랑채인 수락당(壽樂堂). 원래 수락당이라는 현판 글씨는 1603년 당대의 명필인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경정을 위해 썼으며, 1720년 경정의 증손인 이수규가 새겨 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6·25전쟁 때 소실된 뒤 경정의 10세손인 이홍(李鴻)이 건물을 복원한 뒤 다시 썼다. |
광해군 대에 접어들면서 이민성은 조정의 ‘미스터 바른소리’로 활약했다. 1613년(광해군 5년) 영창대군 옥사와 관련한 상소를 올린 이덕형을 구하려다가 함께 파직 당했고, 이후 모후인 인목대비를 폐하려는 논의에 맞서 “전하의 효심이 천고에 없는 변을 입으셨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듬해 왕이 생모를 추존하고 신하들에게 축하를 받는 자리를 가졌는데, 여기서 그는 “예(禮)가 아닌 일인데 신하들이 바로잡아드리지 못하니, 이것이 진짜 죄”라고 일갈하면서 축하 대신 풍자의 글을 올렸다. 1615년 이 때문에 결국 벼슬을 내놓은 뒤 고향 의성으로 내려갔다. 이때부터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까지 8년간 산림에 묻혀 살았다.
1617년 2월 같은 의성에 살던 시인 신지재(1562∼1624)와 빙계에서 어울리며 시회(詩會)를 갖는다. ‘欲分淸趣將誰餉 望梧峯隔翠霞(욕분청취장수향 창망오봉격취하·이 맑은 놀이를 이제 누구와 누리리, 푸른 놀 사이에 두고 슬피 오봉 바라보네)’. 오봉은 신지재의 호이기도 하다. 그는 추운 창가에서 손을 녹이며 혼자서 바둑을 두기도 하고 끽차와 그림 보기, 시 읽기로 엄혹의 시절을 보냈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면서 ‘반정(反正)’을 추인받는 임무를 지닌 중국행 사신단에 그가 포함됐다. 당시 북경에서는 ‘조선이 반정하던 날에 일본군을 끌어들여 궁궐에 불을 질렀으며, 광해군이 화형 당했다’는 유언비어가 돌고 있었다. 그는 황실을 설득했다. “거리의 보통 남편과 아내의 생사도 숨길 수 없는 일인데, 폐군이 비록 덕을 잃고 무도하였다 하더라도 대비의 아들이고, 신하들의 옛 임금입니다. 어찌 시역(弑逆)의 오명을 씌워 조선을 짐승의 나라로 만드려고 하시는지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어질지 못한 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는 배를 이용해 중국을 오갔는데 한 번은 큰 파도를 만났고, 한 번은 고래를 만나 위기에 처했다. 경정은 태연히 뱃머리에 앉아 시를 읊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627년 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좌도의병대장에 천거되어 왕세자를 보호하는 일을 맡았다.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한 뒤 인조를 모시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직했다. 1629년 7월 빙계서원에서 그는 여헌 선생의 강의를 들었다. 이후, 북경 사절단 업무 때 생긴 부스럼이 퍼져 자리에 누운 뒤 8월15일 빙월당(氷月堂)에 쏟아져내리는 달빛이 환한 밤, 눈을 감았다.
시인 이민성의 향기를 딱 두 가지만 더 맛보자. 북경에 갔을 때 조즙이 동지사로 와서 이들 사절단과 어울렸는데, 어느 날 시를 한 수 써서 이민성에게 보냈다. 자신에게 눈병이 났는데 이것을 낫게 하려면 여인이 가슴을 풀어 젖을 짜서 거기에 고약(膏藥)을 타서 발라야 한다는 것이다. 여인이야 도시에 널려 있어도 가슴을 빌려줄 이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다는 장난스러운 내용이었다. 경정은 “‘嘉陵一路饒脂粉(가릉일로요지분·북경으로 오는 길에 여인네가 너무 많은 탓)’에 생긴 병”이라면서 “젖가슴을 생각하다간 병만 더 키울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두 살 더 많은 조즙이 뿔이 나서, “본성을 억누르면 병이 더하게 되는 게 아니냐”고 반박시를 보냈다. 그러자 경정은 ‘嗟哉諱疾而忌醫(차재휘질이기의·안타깝도다 병이 무서워 의사를 피하는구나)’라고 응수하면서 불교의 공즉시색(空卽是色)까지 거론하며 받아쳤고, 조즙이 드디어 항복했다.
또 한 가지. 1620년 겨울, 청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 포로가 된 아우 이민환을 찾으러 가던 중에 넋을 놓고 앉아있는 한 할머니를 만난다. 뼈만 남은 몸에 무릎이 어깨보다 더 높다. “외동 아들이 작년에 군에 뽑혀갔지요. 총 메고 요동 땅으로 건너갔다더군요. 모든 군사가 다 죽고 도망친 이는 없다던데…안고 있는 어린 손자놈을 맡길 데가 없어서.” ‘一子年前屬右營 身充火手渡遼去 全師覆沒無得脫…抱持幼孫無置處(일자연전속우영 신충화수도요거 전사복몰무득탈…포지유손무치처)’ 그래서 죽지도 못하고 있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보여줬다. 시인은 전란과 관의 부패로 신음하는 민초를 향해 따뜻한 시선을 간직하며 그 참상을 고발하던, 조선의 아름다운 리얼리스트였다.
<스토리텔링 전문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Story Memo
‘의성의 이태백’ 스토리는 지역의 킬러콘텐츠가 될 가능성이 많다. 2002년 복원된 빙계서원을 중심으로 한 공간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 이곳에는 경정의 부친인 이광준 선생도 추향되고 있다. 이민성이 주역을 논하고, 시를 읊조렸던 ‘빙월당’을 복원하는 일도 권할 만하다. 이민성은 의성에서 구기자와 복숭아 농사를 직접 했고, 또 구기자를 예찬하는 시를 지었다. ‘한 잔에 입에 침이 돌고, 두 잔에 속이 기름지네, 세 잔에 경혈이 통하고, 네 잔이면 온몸이 다 뚫리네, 다섯 잔에서 열 잔으로 가면 골수가 차는 보약이로다’ 경정의 구기자와 복숭아 사랑을, 지역 특산물로 연결하여 브랜드로 특화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경정의 시와 삶은 다채롭고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아서 지역이 두고두고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 창고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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