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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외극장에서 바라본 크노소스 궁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미노스 문명의 보고다. |
간 크게도, 크레타의 왕 미노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바칠 황소를 가로챈다. 이에 격노한 포세이돈의 저주가 내린다. ‘왕의 아내 파시파에는 황소에게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을 느끼게 될지어다!’ 그리하여 반은 사람, 반은 황소인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난다. 미노스 왕은 건축의 명장인 다이달로스에게 들어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迷宮)을 짓게 하여 미노타우로스를 가둔다. 그리고 해마다 아테네에서 각 7명의 소년 소녀를 데리고 와 미궁의 괴물에게 산 채로 바쳤다.
◆에번스의 크노소스
미노스는 전설속의 왕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는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하면서 이곳이 미노스 왕의 미궁이라 비정했고, 크레타 섬의 고대 청동기 시대를 미노스(미노아)문명이라 명명했다. 그러니까 수천 년 전의 미노스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칭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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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렬한 색상과 역동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크노소스의 프레스코화. 유적지의 것은 모사품이며 진품은 이라클리오 고고학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
크노소스는 이라클리오에서 5㎞ 정도 거리에 있다. 에번스의 기념비가 서 있고 몇 그루의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입구를 지나면 곧장 크노소스 궁전의 유적이 펼쳐진다. 그것은 희고, 넓고, 상상보다 낮다. 중앙의 큰 마당을 중심으로 수백 개의 방들이 들어 앉아 있다. 방들은 크기도 방향도 높이도 같지 않고 계단은 반 층 높이로 오르내리며 시선은 열림과 막힘을 반복한다. 비록 마련된 길과 정해진 동선이 유적의 외피에 한정되어 있지만 평면도와 안내판의 도움을 받으면 다층의 복잡한 구조를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미로의 공간감을 느낄 수는 없지만 분명 전설속의 미궁이라고 믿고 싶어지는 상상이다.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 그리하여 믿는 것을 구현하려 했던 한 사람의 욕망이 이곳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보인다. 에번스 선생은 크노소스를 통째로 사들여 35년간 발굴하면서 동시에 거액을 들여 대담한 복원을 시도했다. 그것은 학문적이고, 조직적이고, 면밀한 것이었지만 또한 상상력과 콘크리트가 포함된 것이었다. 그의 손길은 너무 선명해서 고고학자이자 건설가라는 비난이 수긍된다. 그러나 세계대전과 지진에도 크노소스가 살아남은 것은 건설가 에번스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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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항구의 방파제 끝에 서있는 베네치안 성채.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비해 세운 것으로, 14세기 지진으로 파괴된 것을 16세기에 복원했다. |
◆크레타의 역사는 이라클리오 거리에 새겨져 있다
이라클리오의 고고학 박물관에 가면 고대의 크레타 사람들이 얼마나 쾌활하고 역동적이었는지, 나라는 얼마나 부유하고 막강했는지, 예술은 얼마나 우아하고 세련되고 매력적인지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런 미노스 문명이 쓰러진 이후 크레타는 도리아인, 로마인, 제노바인, 베네치아인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4백여년 간 크레타를 지배한 베네치아인들은 오스만제국의 침략에 대비해 이라클리오를 거대한 요새로 만들었다. 이라클리오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구항구 방파제 끝에 솟아있는 성채가 요새의 요체다.
베네치안 성채에서 해변 도로를 사이에 두고 8월25일 거리가 이어진다. 바다에서부터 완만하게 올라가는 이 길은 크레타 금융의 중심지이자 피의 길이다. 길은 1898년 8월25일 터키의 크레타 주민 대량학살을 기억한다. 길의 끄트머리에 엘 그레코 공원이 자그마하게 들어서 있고 도시의 심장부 역할을 하는 베니젤루 광장이 열려 있다. 광장의 오른쪽에는 힌다코스 거리가, 왼쪽에는 보행자 전용 도로인 다달루 거리가 모두 식당과 카페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광장에서 계속 직진하면 1821거리다. 1821년은 그리스가 독립을 선포한 해다. 이 길을 따라 계속 직진하면 베네치안 성벽의 남쪽 벽에 닿는다. 성채에서부터 남쪽 성벽까지, 미로 같은 골목을 만들며 이어지는 이 길에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크레타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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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파문당한 그는 공동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베네치안 남쪽 성벽 위에 묻혔다. |
◆그리스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
베네치안 성벽의 남쪽 벽의 중앙에 아름다운 묘가 하나 있다. 그곳에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잠들어 있다. 묘지에 오르면 이라클리오의 하얀 집들과 푸른 에게해가 눈앞에 펼쳐진다. 크레타는 1830년 그리스 영토로 귀속되었지만 곧 이집트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다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는 등 침략과 지배와 반란과 저항이 반복되는 피의 19세기였다. 크레타가 완전히 그리스의 영토가 된 것은 1913년이다. 카잔차키스는 1883년 오스만 치하의 이라클리오에서 태어나 격동의 청년 시절을 보냈다. 이후 세계대전과 내전 등을 겪으면서 그는 인간의 자유와, 죽음과, 신과 영혼, 그리고 한계에 저항하는 투쟁적 인간상에 몰두했다. 오후 6시, 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바다와 하늘과 크레타는 너무나 평화롭다. 나무 십자가의 그림자가 묘석위에 드리워지고 묘비가 태양빛에 반짝인다. 거기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크레타를 떠나며
저녁 아홉시 반, 밤은 무대에 막이 내리듯, 어둠이 온다는 의식보다도 빠르게 내려온다. 아테네로 향하는 거대한 배의 후미에 서서 불빛 반짝이는 크레타를 본다. 미궁의 건축가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다. 더 높이 날고자 했던 이카루스는 결국 추락했다. 하느님을 사랑했던 그리스인 카잔차키스는 교회의 박해를 받았고 20세기의 미궁을 구현코자 했던 에번스는 비난 속에 있다. 자유와 욕망은 결과적으로 적대적인 것일까. 그러나 바라는 것이 많고, 두려운 것도 많지만, 믿고 싶다, 나는 자유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TIP
이라클리오의 중심은 구 항구에서 베니젤로 광장으로 이어지는 구역으로 상점, 시장, 먹을 곳, 잠잘 곳 등이 모두 모여 있다. 이라클리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크노소스로 가는 버스가 10분 간격으로 있다. 폐장 시간은 반드시 미리 알아보고 가야 한다. 크노소스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모두 이라클리오의 고고학 박물관에 있다. 공사 중이라 주요 유물만 따로 전시되어 있지만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것이다. 학생증이 있으면 입장료가 절반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는 베니젤로 광장에서 도보로 20여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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