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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조리법을 복원해 만든 음식 중심으로 차려진 소부상 차림.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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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8편은 영양 음식디미방과 산채비빔밥에 대한 이야기다. 음식디미방은 영양에서 살았던 장계향이 쓴 최초의 한글 조리서다. 책에는 총 146가지 조리법이 담겨 있다. 최근 건강음식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많은 요리연구가가 다시 이 책을 찾고 있다. 조상들의 밥상에 올라갔던 전통 건강음식과 그 음식의 조리법이 자세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책 속의 음식은 귀한 손님이 왔을 때나 집안의 큰 행사, 보양을 위해 만들었던 음식을 빼고는 대부분 저칼로리 건강식이 특징이다. 경북도는 이미 2010년부터 이 책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청정지역인 영양 산나물로 만든 산채비빔밥은 맛의 진수를 보여준다. 산나물의 보고(寶庫)인 영양 일월산(해발 1천219m) 산채는 오염되지 않은 땅과 공기 속에서 자라나 칼륨·칼슘 등 각종 영양소가 골고루 함유돼 있다. 맛과 향도 다른 지역보다 뛰어나다고 한다.
산채산업화를 이뤄내기 위해 해마다 5월이면 영양에서 산채 박람회가 열린다. 참여인원과 매출액은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인스턴트 음식에 지친 도시민이 영양 산채로 버무린 비빔밥을 먹으면 활력을 얻는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자연에서 얻은 농산물을 재료로 만든 음식디미방과 산채비빔밥. 맛의 비결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지 지금 이야기 속에서 확인해보자.
◆ 영양의 대표 음식- 디미방과 비빔밥
영양군의 대표음식으로는 단연 산채비빔밥이 꼽힌다. 그리고 최근 들어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의 재령이씨 종가에서 새로 발견된 ‘음식디미방’의 재연 음식들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산채비빔밥은 영양의 지리적인 조건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맛이다. 비빔밥은 우리나라의 대표 음식이라 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패스트푸드처럼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비빔밥 전문점도 생겨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영양의 산채비빔밥은 비빔밥의 백미로 꼽힌다.
영양은 태백산맥의 지맥이 둘러싸고 있는 산간 고장이다. 그래서 산나물이 흔하다. 산이 높고 일교차가 심해 깊은 산속에 많은 향취 나는 산나물을 키워낸다. 특히 일월산의 산나물은 예부터 임금에게 진상될 정도로 유명하다. 영양의 봄 축제의 하나인 산채한마당은 이러한 산나물의 의미를 되새기는 축제다.
산나물은 종류가 다양하다. 고사리, 금죽, 취나물, 방풍나물, 다래순, 어수리, 싸릿대, 참딱주(잔대), 고비, 고사리는 물론 도라지와 더덕, 각종 버섯들…. 그중 일부는 하우스 재배로 대량 생산이 되기도 한다. 어수리나물이 가장 대표되는 재배 작물이다. 취나물과 고사리 등도 고랭지에서 재배되고 있다. 영양지역은 해발고도가 높아서 재배를 해도 역시 그 맛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산나물 요리는 아주 오래되어서 그 비법도 다양하게 전수되고 있다. 영양의 이름난 식당에서 맛보는 산채비빔밥은 각기 나물들의 특화된 조리방식과 아울러 여러 가지 나물들이 서로 어우러지게 요리됨으로써 진미를 더한다. 비빔밥은 어떤 나물을 넣고 어떤 맛의 고추장을 첨가하느냐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다. 영양의 산채비빔밥은 영양지역에서 나는 산채의 자연 그대로의 맛과 영양고추로 만든 고추장의 조합이어서 빛을 발한다.
한편‘음식디미방’은 이 지역 양반가의 전통음식상을 풍성하게 하는 각종 음식의 보고이다. 흔히 영남지역의 음식은 특별히 볼 게 없다고 말하지만, ‘음식디미방’의 음식들은 그러한 생각이 틀렸음을 잘 보여준다. ‘음식디미방’이 전래된 내력을 들어보면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익히고 삭혀온 맛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 조선중기 영남지방의 맛 발견
1960년 경북대 김사엽 교수는 이시명의 둘째 아들 존재 이휘일의 후손 서가를 조사 중이었다. 그 조사에서 뜻밖에도 ‘예사롭지 않은 서책’을 발견했다. 김사엽은 그 책을 따로 빼놓았다. 다른 책을 뒤적이면서도 자꾸 그 책에 눈이 갔다. “음식 이름들이군.” 그는 다시 그 책을 훑어보았다. 한글 궁체로 쓴 4.6배판의 책은 30쪽 정도로 얇았지만, 종이 질은 좋았다. 표지에 쓴 제목은 ‘규곤시의발’이었다. 규곤은 여성이 기거하는 안방을 뜻한다.
“그렇다면 여성이 읽는 무슨 길잡이 같은 책일까?” 다시 살피니 속장의 첫 장에서는 ‘음식디미방’이라 쓰여 있었다. ‘디’란 ‘지(知)’의 옛말이다. 그러니까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란 의미가 된다. 표지의 제목과 내용의 제목이 다른 건 원래 ‘음식디미방’이었던 제목을 뒤에 누군가가 약간 유식하게 바꾸어 썼기 때문인 듯했다. 무엇보다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책의 앞뒤 표지 안쪽 면에 있는 시와 글이었다. 앞표지 안쪽 면에 있는 시는 중당 때의 시인 왕건의 시였다.
시집온 지 삼일 만에 부엌에 들어
손을 씻고 국을 끓이지만
아직 시어머니의 식성을 몰라
어린 소녀를 보내어 먼저 맛보게 하네
그리고 뒤표지 안쪽에는 “이 책을 이리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잘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이 책을 각자 베껴가되 가져갈 생각일랑 절대로 내지 말며,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빨리 떨어져버리게 하지 말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1600년대 조선 중기의 경상도 지방의 양반 가정에서 만들던 음식과 요리법은 물론, 발효식품들과 음식의 저장방법들을 망라한 아주 귀중한 책이었던 게다. 김사엽은 온몸이 흥분으로 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저자를 보니, 영양 두들마을의 시조로 꼽히는 석계 이시명의 부인 장계향이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동아시아에서 여성이 쓴 최초의 조리서일 뿐만 아니라 한글로 쓴 음식에 관한 최초의 책이라 할 수 있었다.
책에 실은 음식은 면병류(면과 떡) 18가지, 어육류 74가지, 주류 및 식초류 54가지다. 여기에다 부록으로 ‘맛질방문’이라 쓰여진 게 16종이 들어 있다. 그녀의 친정어머니 권씨의 친정마을이 예천 맛질이다. 이로 미루어 ‘맛질방문’은 그녀가 친정어머니를 통해 전수받았던 예천 맛질의 안동권씨 문중의 음식 조리법을 소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대단한 발견이었다.
김사엽은 바로 책의 연구에 들어갔다. 그의 논문이 발표되자 전통음식연구가들은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음식디미방’은 ‘다시 보고배우는 음식디미방’(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 저), ‘음식디미방 주해’(백두현 경북대학교 교수 저) 등의 여러 권의 책과 각종 논문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울러 이 책의 내용대로 음식을 재연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늘어났다.
무엇보다 이시명의 후예들인 재령이씨 종가에서 누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음식을 밝힌 책이라는 점을 아주 귀하게 여겨 이 집안의 전통 음식을 다시 체계적으로 재연하려는 의욕이 커졌다. 그리하여 현재 13대 종부를 통해 다른 지역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경북 북부지역 양반가의 전통음식이 새롭게 복원되고 있다.
◆ 시서화에 능한 조리의 대가
장계향은 1598년(선조 31년) 안동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의 문하에서 공부한 장흥효다. 외동딸로 태어났다. 후에 이복동생을 얻기 전까지는 무남독녀로 자랐다. 어려서부터 초서를 특히 잘 썼다. 당시 명필로 이름을 떨치던 청풍자 선생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시를 잘 썼고, 그림도 잘 그렸다. 시와 맹호도 한 점도 남아 있다.
19살에 재령 이씨 이함의 셋째아들 석계 이시명과 혼인했다. 장흥효가 제자인 이시명이 아내와 사별하자 자신의 딸과 혼인을 시킨 것이다. 장계향은 윗동서 두 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맏며느리 역할을 맡았다. 병자호란 이후 은둔생활을 시작한 남편을 대신해 집안도 지켰다. 일곱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도 훌륭하게 키웠다.
장계향은 사람을 아끼는 마음도 넉넉했다고 한다. 살림이 넉넉하지도 않았는데 대문 밖에 큰 솥을 걸고 도토리죽을 쒀 300명이나 되는 걸인들을 먹였다고 한다. 끼니 때 연기가 안 나는 집에는 사람을 보내 양식도 주었다.
장계향은 25세가 되던 해 친정어머니가 죽자 새어머니를 모셨고, 아버지가 어린 이복동생들을 남기고 죽자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살림을 보살폈다. 지금 고택이 있는 영양군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은 장계향이 시아버지가 죽자 남편과 터를 잡은 곳이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이 남긴 책 ‘정부인 안동장씨실기’에 그녀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이현일이 이조판서가 되자 그녀에게는 정부인 품계가 내려지기도 했다. 숙종 8년 83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녀가 ‘음식디미방’을 쓴 것은 만년인 75세 때다. 재령이씨 종가의 음식은 나름대로 독특하여 이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꼼꼼하게 기록한 것이다. 며느리와 딸들에게 전래의 음식 조리법을 알려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 책은 그녀의 아들 이휘일의 종가에서 꾸준히 보존되어 왔다. 이 가문의 딸들이 필사하여 갔을 뿐 책으로 간행되거나 다른 집안으로 건너간 적이 없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왔다. 그녀는 곧잘 신사임당과 비견되기도 한다. 시와 서, 그리고 화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자식을 잘 건사하여 판서로 키워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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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디미방 체험관에서 바라본 두들마을 전경.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 음식디미방, 대중적인 음식으로 부활
‘음식디미방’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지고 있다. 두들마을에는 ‘음식디미방’의 기념관과 체험관을 두어서 단체로 손님을 받기도 한다. 단 한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하는데, 열 명 이상이 되어야 한다. 음식을 만드는 시간이 길고 그 양이 한정되어서 그러하다. 종부는 안동 지역에서 열리는 종가포럼에 참여하고 종가음식에 대한 강연도 한다.
‘음식디미방’을 세상에 알리는 데 종손과 종부만 열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2006년 ‘영양군 음식디미방 보존회’가 결성돼 일부 음식을 재연하고 있다. 2009년엔 영양군청에서 허성미 안동과학대 교수에게 ‘음식디미방 레시피 표준화 작업’을 의뢰하기도 했다.
이 집안에 내려오는 음식들은 현 종부의 솜씨로 드러난다. 가령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석이편(석이버섯떡)의 담백한 맛을 한번 맛본 이들은 쉬 잊지 못한다. 석이버섯을 잘게 다져 찹쌀가루, 쌀가루와 섞어 떡을 만들고 그 위에 잣가루를 얹었다. 설탕을 쓰지 않아 얼핏 거친 맛을 주지만, 씹을수록 그 맛이 미묘하게 느껴진다. 양반가의 은근한 미각이 그러한 것일까?
‘음식디미방’의 음식은 고춧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아 자극적이지 않다. 대부분 찌는 방법을 사용해 담백하다. 모든 음식에 고추가 들어가지 않는 것은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게 임진왜란 때니 그럴 만하다. 그 대신 천초, 후추, 마늘, 파가 들어간다. 육류요리가 많은데 재료는 주로 소의 위나 개고기, 꿩고기다. 개고기의 창자로 만든 순대는 물론 개장찜, 개장느르미, 누렁개 삶는 법도 있다.
각종 한과와 떡 만드는 법도 다양하다. 숭어나 모시조개, 참게로 만드는 요리 등도 눈길을 끈다. 술 빚는 법도 여러 가지다. 두 장의 기왓장을 붙여 불에 데워 만드는 다식은 오늘날 과자를 굽는 것과 비슷하다.
글=이하석(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공동기획: 공동기획: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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