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2] 作家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13> 이하석이 만난 구미 잉어찜

  • 사진=박관영
  • |
  • 입력 2012-09-17   |  발행일 2012-09-17 제13면   |  수정 2021-06-02 16:02
20120917
구미의 대표적인 음식인 잉어찜. 그 옛날 낙동강을 오가는 길손을 위해 내놓았던 잉어찜은 맛이 좋아,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인기 메뉴다.
20120917
이하석
◆Story Memo
구미의 낙동강은 오랜 세월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삼국의 문물이 낙동강을 통해 오갔고, 신라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아도화상 역시 강을 건너 구미로 들어왔다. 조선시대에는 영남대로가 이곳을 지나면서 과거길에 오른 선비들이 구미의 낙동강 길을 오르내렸다. 문명과 문명을 이어주는 길목이 구미의 낙동강이었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구미에는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나루가 많았고, 나루를 통해 드나드는 길손을 대접하기 위한 음식이 발달했다. 잉어찜이 대표적이다. 뱃전에 뛰어오를 정도로 ‘잉어천지’였던 구미는, 나루를 중심으로 지역의 특성에 맞는 음식을 개발해 지금까지 그 맛을 이어오고 있다. ‘작가,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13편은 구미 특유의 맛과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잉어찜에 대한 이야기다.


20120917
문천대씨의 식당에는 옛맛을 잊지 못하는 손님으로 사시사철 북적인다. 갖은 양념에 얼큰한 국물이 일품인 매운탕이 먹음직스럽게 끓고 있다.
20120917
구미 낙동강 비산나루터의 뱃길이 끊기면서 뱃사공을 그만두고 대구식당을 운영중인 문천대씨. 문씨의 식당에는 잉어찜은 물론 매운탕과 조림, 장어구이 등이 인기메뉴다. 문씨가 매운탕을 요리하고 있다.
#1 뱃사공 여인, 잉어찜 40년 전통을 잇다

구미가 내세우는 대표 음식은 잉어찜이다.

전설처럼, 잉어찜을 팔기 시작했던 시절의 얘기가 전해온다.

문천대라는 여인의 얘기다. 그녀는 젊은 시절에 뱃사공이었다. 구미 비산나루를 왕래하던 배를 진주(배를 미는 긴 막대기)로 밀며 사람들을 태워 날랐다.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처녀 뱃사공이라 부르기도 하고, 새댁 뱃사공이라고도 불렀다. 험한 뱃사공 일을 왜 하게 됐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그녀는 팔자라고 대답하곤 했다. 대구에서 시집와서 보니 자신보다 열네 살이나 많은 남편이 하필 뱃사공이었다. 비산나루의 구미 쪽 산 아래의 궁벽한 물가에 있는 조그만 집에 살면서, 낮에는 물론 밤에도 누가 문을 두드리거나, 건너편에서 부르면 배를 저어가야 했다. 어쩌다보니 남편 대신 배를 저을 일이 생겼는데, 그 이후 뱃사공 일이 그녀의 일이 되어버렸다.

구미의 낙동강에는 나루가 많다. 비산나루는 구미에서 인동 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장천 가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비산나루 위쪽에는 강정나루가 있었고, 1㎞ 아래쪽 건너편에는 동락나루가 있었다. 그러니까, 과거 성업했던 낙동강 나루터들을 중심으로 해서 특히 잉어요리가 중요하게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동락, 비산나루 등의 낙동강 양안에는 주막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이들은 강을 건너는 행인들과 보부상을 대상으로 매운탕과 잉어찜을 팔았다. 이들 주막이 구미 잉어찜과 매운탕의 본가인 셈이다. 마주보고 있는 양안의 식당들은 서로 자기네들이 본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강을 따라 자연스럽게 시작한 거지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비산나루와 동락나루는 강을 사이하고 약간 떨어져 마주보지만, 나루터가 있을 때는 왕래가 많았다. 그러다가 나루터의 역할이 사라지고 다리가 생기면서 나루터 주막이 슬금슬금 식당으로 변신하여 생계 수단으로 삼기 시작했다. 문천대씨 역시 그렇게 시작했다. 비산나루터에 대구식당이란 간판을 걸고 운영한 지도 40년이 넘는다.

그녀의 남편은 뱃사공에다 고기잡이였다. 낙동강에는 잉어가 많이 잡혔다. 때로는 잉어천지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고기가 풍부했다. 뱃전에 고기들이 뛰어오를 때도 있었으니까. 그 잉어들을 요리해서 찜으로 탕으로 내놓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구미음식의 한 특성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도 연구를 많이 해서 시작한 것”이라고 문천대씨는 말한다.

대구로 서울로 전국의 유명 식당을 찾아다니면서 잉어요리를 눈여겨보며 곁눈질로, 또는 적극적으로 물어가며 배웠다. 그런 다음 자신의 방식으로 요리법을 개발했다. 그 가운데 매운탕과 찜이 유명해지면서 찾는 이들이 늘어났다.

구미가 산업화의 중심으로 거듭나면서 공단 근무 인구가 늘어났고, 이들이 식당으로 몰려오면서 한 때 호황을 이루기도 했다. 비산과 동락은 잉어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비산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구미의 주 생활권이었다. 반면 동락은 칠곡권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 개통된 구미대교로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동락의 식당가가 관심을 끌었다. 비산 쪽의 강안은 강안도로의 정비에다 최근 개통된 산호대교의 휘황찬란한 야간 조명, 그리고 강 건너 구미2·3공단 불빛이 아름다워서 젊은 연인은 물론 가족이 즐겨 찾는다.



#2 예부터 복을 가져다 주고 효를 상징

잉어는 우리나라 전역의 담수에서 서식하는 비교적 큰 고기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음식 재료로서 오랜 역사를 가졌다. 처음에는 몸을 보하는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잉어는 소변을 원활하게 보게 하고 기를 내리고 태아를 안정시킨다고 한다. 또한 임산부의 몸이 붓는 것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고 한다. ‘동의보감’과 ‘재물보(才物譜)’에서는 니어(鯉魚),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와 ‘전어지(佃漁志)’에서는 리어(鯉魚)라고 했다. 기원전 500년경의 중국 문헌 ‘양어경(養魚經)’과 우리나라 문헌 ‘장경’에 잉어 양식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삼진기(三秦記)’에 용문의 잉어 얘기가 나온다. 곤륜산에서 흐르는 물은 적석산을 통하고 나서 용문폭포를 이룬다. 해마다 많은 잉어들이 이 폭포를 뛰어 오르려고 모여든다. 뛰어 오르면 용이 된다고 하여 ‘등용문’이라는 말이 생겼다. 출세가도를 탄다라는 의미다. 이때부터 약리도(躍鯉圖-잉어가 하늘로 뛰어오르는 모습 )를 그렸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선비들의 방에는 잉어를 그린 그림을 붙여 놓고 과거에 장원급제를 기원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치르던 창덕궁 영화당 옆 부용지의 축대에는 잉어 조각이 있다.

잉어는 복을 가져다주는 동물로도 인식된다. 잉어 꿈을 꾸면 임산부는 아들을 낳고, 관직에 있는 사람은 크게 출세하며, 사업가는 사업이 번창한다고 믿었다. 또한 민화 ‘효제도(孝悌圖)’에 효를 표현할 때는 항상 잉어를 그렸다. 잉어가 효를 상징하게 된 것은 ‘오륜행실도’에 수록된 왕상의 효행담 때문이다.

왕상은 효성이 지극했다. 계모가 추운 겨울에 잉어를 잡아오라고 했다. 강가로 나가 얼음을 깨자 잉어가 쌍으로 뛰어 올랐다. 그걸로 계모를 잘 봉양했다는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나라로 전파되어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병든 부모님을 봉양하는 이야기가 전국에 걸쳐 많이 전해진다.

잉어는 보양식으로 고아 먹거나 매운탕, 회 등으로 즐긴다. 지금은 요릿집을 통해 사시사철 잉어찜을 먹을 수 있지만, 원래 여름철 허한 기운을 보강하기 위한 보양음식이었다.



#3 채소가 많이 곁들어지는 구미 잉어찜

안동과 구미 등 낙동강을 연해 있는 지방에서는 특히 잉어를 이용한 찜 요리가 발달했다. 향토음식은 한 고장에서 독특하게 개발되고, 그 고장이 갖는 기후와 지세, 자연환경에 순응하여 나타난다. 구미지역은 낙동강이라는 지세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구미는 한반도의 남부 내륙형 기후에 속한다. 낙동강을 따라 형성된 평야지대가 질펀하게 펼쳐지고, 강안을 벗어나면 바로 산간지대가 병존한다. 따라서 품질 좋은 벼와 잡곡이 많이 생산되며, 민물고기가 많이 잡힌다. 산채 등도 꽤 생산된다. 이런 음식이 자연스럽게 조합되고 융합되어 잉어찜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낙동강 유역에 자리 잡은 안동과 구미의 잉어찜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달리 조리된다. 안동의 잉어찜은 콩나물을 곁들이는 게 특이하다. 콩나물의 머리를 떼고, 아삭한 식감이 살아 있도록 살짝 삶아서 완성된 잉어찜에 곁들인다. 이에 비해 구미의 잉어찜은 채소가 많이 곁들여진다.

재료는 잉어는 물론 무와 감자, 시래기나물, 팽이버섯, 양파, 당근, 부추, 깻잎, 청양고추, 된장, 간장, 다진 마늘, 고춧가루, 고추장, 후춧가루 등이다. 잉어는 비늘을 긁고 내장을 꺼내 씻은 뒤 칼집을 어슷하게 넣는다. 준비한 잉어에 소금, 후춧가루를 뿌려 재워둔다. 무는 5㎝ 크기의 반달 모양으로 자른 뒤 익혀둔다. 양념장을 만들고 야채는 씻어서 썰어둔다. 시래기나물은 불린 뒤 푹 삶는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잉어를 지진다. 냄비에 시래기나물, 감자, 지진 잉어를 얹고 잉어 위에 양념장과 야채를 넣어 20~30분 동안 쪄낸다.

잉어찜은 구미 지역의 낙동강 근처 주민이 즐겨 먹던 보양식품으로 인식되면서 수요가 늘어났다. 이 지역의 잉어찜은 갓 잡은 잉어로 요리하는 걸 큰 장점으로 꼽는다. 신선도가 뛰어나다는 게다. 비린내도 덜 나게 각종 첨가물이 쓰여졌다. 특히 갖은 양념을 써서 비린맛과 잡냄새를 제거했다. 고기의 살이 탄력이 있어서 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난다.

구미 매운탕촌은 구미공단이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운탕 집은 구미공단의 공식 회식장소로 인기가 있었다. 무엇보다 공단 간부들의 이용이 잦았다. 일본, 미국 바이어들이 들이닥치면 으레 이들 두 곳의 매운탕 식당가로 안내했다.

잉어 요리는 푹 고아서 뼈를 발라내고 주로 국물을 먹는 보양식이 전래되었으며 잉어회를 떠서 초장에 찍어먹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식당 음식으로 잉어탕, 잉어찜으로 거듭났다. 구미 낙동강 양안의 식당은 처음에는 매운탕이 주류였다. 1980년대 들자 손님이 많아지면서 다양한 요리를 탐하는 데 착안, 찜요리를 개발해낸 것이다. 처음에는 갈비찜 솜씨를 응용해서 잉어찜 요리를 나름대로 선보였다. 동락나루의 한 식당이 잉어찜 양념을 두 번 바르는 것으로 차별화를 시도하면 다른 식당에서도 그와 비슷한 것을 개발하는 등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손님들에게 시식을 시켜서 찜의 맛을 가늠하기도 했다. 특히 주요 회사 간부급 단골들의 입맛에 맞게 자주 초대해서 맛을 보이기도 했다. 차츰 찜의 맛이 기막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잉어찜이 어느덧 주요 메뉴로 자리 잡았다.



#4 추억과 함께 전승되는 구미 음식

이밖에도 구미 음식으로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다른 농촌도 그렇지만, 구미 지역의 향토음식은 춘궁기나 재해 때 구황음식으로 많이 만들어 먹었던 주식이나 부식이 그때의 추억과 더불어 전승되고 있다. 솔잎가루를 쌀과 함께 밥을 지어 먹었던 솔잎밥, 감자보리밥, 쑥밥, 무밥, 콩나물밥 등이 있다. 메밀수제비나 찹쌀수제비를 간식으로 먹기도 한다.

호박죽, 호박범벅 등은 지금도 계절 음식으로 즐겨 먹는다. 탕류 및 찜류로는 잉어찜 외에도 낙동강의 신선한 생선을 이용한 메기매운탕, 가오리찜, 청어시래기찜이 여전히 미식가들의 미각을 유혹하고 있다. 가을이 되면 통통한 살이 오른 미꾸라지를 이용한 추어탕이 있다. 추어탕은 냉장시설의 발달로 이젠 사철 먹는 음식으로 전문 식당들이 개장되고 있다. 또한 보리등겨장은 선산과 해평 지역에서 많이 먹었다. 송기송편, 송기떡, 모시송편 등의 떡들이 잔칫상에 올려지는 건 여전하다. 도개 지역의 밀주머니떡도 눈길을 끈다. 쌀로 만든 선산약주와 석감주도 향토음식으로 유명하다.


이하석(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