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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군 강구항으로 진입하는 다리 교각 위에 있는 대게 조형물. 강구항 주변에는 150여곳의 대게 음식점이 있는데, 해마다 대게철이면 손님들로 북적인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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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일 |
영덕대게는 예나 지금이나 전국적으로 이름난 영덕의 대표적인 특산물이다. 몸집이 유난히 큰 것은 물론 담백한 맛과 향이 일품이다. 또 저지방 고단백 식품이라 소화가 잘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게 먹고 체한 사람 없다’는 옛말은 그런 연유에서 나왔다. 특히 영덕대게는 고려 태조 왕건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기 931년 왕건은 예주(지금의 영덕 영해지역)를 처음 순시하며 하룻밤을 머물게 된다. 이때 임금의 수라상에 대게가 올려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영덕군은 지난해 영덕대게 축제 중 ‘태조왕건 행차와 대게진상 체험’행사를 열기도 했다. ‘작가,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14편은 고려태조 왕건과 영덕대게에 얽힌 이야기를 픽션을 가미해 재구성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오누이와 주변인물은 이야기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등장시킨 가상의 인물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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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대게는 고려 태조 왕건의 수라상에 올려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맛과 향이 일품이다. 2010년에는 G20세계정상회의 만찬식탁에도 올라 예나 지금이나 그 맛을 인정받고 있다. 박관영기자 |
왕은 영덕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작은 바닷가 마을이었어요. 번듯한 숙소가 없어 촌주로 있는 박사(博士)집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금성에서 박사 벼슬을 한 적이 있어 사람들이 그를 박사라고 불렀지요.
바다를 끼고 있는 좁다란 길을 따라 숙소를 찾아가는데, 이상한 냄새가 났습니다. 물가에 초막 한 채가 있었지요. 돌덩이에 나무를 꽂아 세우고 거적때기를 걸쳐 겨우 하늘을 가리는 정도의 막집이었습니다. 오누이가 살았는데, 남자애는 열 살이 조금 넘은 것 같고 여자애는 그만큼도 안 돼 보였어요. 덕이라는 아이가 그물에 달라붙은 무언가를 뜯어내는 중이었고, 영이라 부르는 동생은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화덕에 걸친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왔습니다. 그 냄새를 왕이 맡은 것이지요.
“바다에서 잡은 것이냐? 무엇이냐?”
왕은 한 때 궁예의 수군을 지휘한 장수였으므로 온갖 해산물을 아는데, 덕이 손에 들려있는 그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다리모양이 대나무 같다고 대게(竹蟹, 죽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커다래서 대게(大蟹, 대해)라는 사람도 있어.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다 맞는 말이니까.”
“참 크고 이상한 벌레구나.”
“벌레가 아니야. 게는 태양국 백성이지.”
“태양국의 백성이라?”
왕이 웃었습니다.
“기다려봐. 증거가 있어. 대게를 찌고 나면 알게 될 걸.”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멈춰 서서 대게가 익도록 기다릴 수는 없었지요. 숙소에 도착하니 박사부인이 마을여인들과 상을 차려냈습니다. 푸짐했지만 입맛에 맞지 않아 왕은 몇 술 뜨고 상을 물렸습니다. 왕은 아까 맡은 대게냄새가 잊히지 않아 박사를 불렀습니다.
“이곳에 대게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다. 왜 상에 올리지 않는가?”
박사가 펄쩍 뛰며 대답했지요.
“흉물입니다. 저희도 입에 대지 않는 것을 어찌 왕에게 올리겠습니까?”
바닷가에서 대게를 찌는 아이를 보았다고 하자, 그 사연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몇 해 전 견훤이 이곳을 휩쓸 때, 집이 불타고 아비 어미가 화를 당했습니다. 그 뒤로 오누이가 마을에서 떨어져 거지꼴로 사는데, 대게 따위를 쪄먹고 생명을 부지합니다. 더럽고 사나운 애들입니다.”
왕은 박사에게 오누이를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오누이는 조금 전에 본 사람이 왕이었단 걸 알고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지요. 영이가 대게를 찌는 동안 왕이 덕이에게 물었습니다.
“대게가 태양국 백성이라는 얘기를 더 해 보아라. 내가 고창(안동)싸움에서 견훤을 크게 이긴 뒤로 신라의 크고 작은 100여 고을이 놀라 백기를 들었다. 너도 이제 신라의 백성이 아니라 고려의 백성이다. 그러면 저 화덕 위에서 익고 있는 대게는 태양국 백성이냐, 고려의 백성이냐?”
“대게는 신라 백성도 아니고 고려의 백성도 아니야. 대게는 태양국 백성이야.”
박사가 덕이의 입을 막으려했습니다. 다 같이 불경죄로 목이 달아날까 두려웠던 것이지요. 왕은 덕이가 말을 하게 내버려두라 했습니다.
“태양은 게을러. 태양은 혼자서 못 움직여. 그래서 대게들이 집게다리로 콱 집어 바다 속 봉우리까지 데려가지. 거기서 힘을 합쳐서 태양을 하늘로 던져 올려. 그게 아침이야. 그럼 태양은 떠올랐다가 천천히 하늘을 가로질러서 떨어져. 그럼 밤이 되고. 대게들은 서쪽에 떨어진 태양을 밤새 찾아 와.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또 하늘로 던져 올리지. 불덩이 태양 가까이서 녹지 않도록 대게껍질이 단단한 거야. 열 번도 넘게 딱지를 벗으면서 단단해져.”
덕이의 말은 기이했습니다. 무엇보다 뱀이 허물을 벗듯 딱딱한 껍질을 벗는다는 게 쉽게 믿어지지 않았지요.
“그것이 대게들의 일이야. 하늘은 그 공을 헤아려서 대게가 죽으면 태양의 빛깔을 갖게 하는 거고.”
태양의 빛깔이라니, 왕은 더욱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영이의 목소리가 들렸지요.
“오라버니, 다 쪘어. 먹자.”
태양의 백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한다는 것일까. 왕은 덕이와 함께 화덕으로 다가갔습니다. 영이가 솥뚜껑을 열었습니다. 모두들 “와” 하고 박수를 쳤지요. 하얀 김이 사방으로 퍼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게살 익은 냄새만 진동했습니다. 이번엔 다들 숨을 크게 들이쉬었지요. 그리고 김이 걷혔을 때 왕은 보았습니다. 오누이를 빼고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 모두 탄성을 내뱉었습니다. 은은한 자두 빛깔이었던 대게가 잘 익은 사과 빛깔로 변해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태양이 가진 황홀한 빛깔이었지요. 사람 혀가 빨간 것처럼 덕이의 말은 틀림없었습니다.
“그래 이제 네 말을 믿겠구나. 대게가 태양나라 백성이라는 것을 알겠다.”
대게 다리가 왕과 신하들에게 나눠졌습니다. 붉은 껍질을 가르니 속에서 눈꽃처럼 하얀 살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선뜻 입 안에 넣기가 망설여졌지요. 하지만 그 냄새와 빛깔은 묘하게 침샘을 건드렸습니다. 맛은 어떨까. 왕이 먼저 살을 뜯어 입 안에 넣었지요. 한참 오물거리기만 하더니 왕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음.”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신하들을 보며 왕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어서 입에 넣으라는 표시를 했습니다. 신하들도 마지못해 맛보았습니다. 한쪽에서는, 이제 곧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아 박사와 마을사람들이 가슴 졸였지요. 대게 맛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하들 또한 왕처럼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다만 부드러운 살을 씹으며 “음. 음. 음.” 했지요.
그리고 다시 어명을 받들어 덕이와 영이는 그 자리에서 대게 오십 마리를 쪄 내었습니다. 이번에는 마을사람들도 곳곳에 화덕을 놓고 불을 피워 도왔습니다.
“대게를 찔 때는 뒤집어. 그래야 내장이 안 흘러. 등을 뒤집어.”
영이가 대게를 처음 쪄보는 사람 사이를 돌아다니며 말했습니다. 아이의 지혜로움에 모두 감탄했습니다. 마을사람도 대게를 조금씩 맛보고 비로소 그 맛을 알게 됐지요.
영이는 살이 없다고 내버린 대게의 다리 낱낱과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영이가 도랑도랑하게 말했습니다.
“집에 가서 이것 넣고 국 끓여 먹어.”
그러면 대게향이 진하게 우러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다리를 얻어가려고 실랑이하자, 영이는 공평하게 나눠줬지요. 늘 차갑게만 대하던 마을사람이 관심을 보이자 영이도 오늘은 기뻤습니다. 왕이 많은 상을 내려 주려 했지만, 오누이는 게딱지 하나에 쌀을 받아 돌아갔습니다.
금성으로 출발하는 날. 왕은 박사에게 이곳에 학교를 세우고 오누이를 잘 돌봐주라 명했습니다. 그것이 곧 국가의 일이며, 고려의 백성이 가난하다하여 복지와 교육에서 소외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지요.
신라왕이 오래 머물기를 청하여 고려왕은 수십 일을 지내다가 금성을 떠났습니다. 왕은 신라의 항복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친교를 맺었어요.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으며, 큰일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은 정성을 들이는 시간 속에 차곡차곡 쌓이겠지. 대게의 살이 차오르듯, 그때가면 세상은 묵은 껍질을 벗고 새 살이 자랄 거야.’ 왕은 생각했습니다.
고려왕은 오누이를 보려고 바닷가마을을 다시 찾았습니다. 덕이는 마을사람들을 데리고 대게를 잡으러 나가고 없었지요. 해 뜨기 전 어둑한 시간이었습니다. 영이는 부러진 대게 다리를 쥐었다 놨다하며 산수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박사는 오누이가 사는 초막에 돌을 둘러 바람벽을 만들었다며 뿌듯해했습니다.
“배를 띄워서 덕이를 불러들일까요?”
신하의 말에 왕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니다. 기다리자.”
왕은 영이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영이는 하나 더하기 하나에서 시작해 둘 빼기 하나까지 진도가 나가있었습니다.
“영이야, 덕이 오라버니 마중 갈까?”
“오라버니가 바보인줄 알아? 잘 알아서 올 걸, 뭐 하러. 난 나물 뜯으러가야 돼. 나물 해놓고 학교 갈 거야.”
갑자기 영이가 집게다리 하나를 쑥 내밀었습니다. 왕이 움찔했습니다.
“히히히, 꼬집을까봐 겁먹었지? 왕아저씨, 국 끓여먹어.”
영이는 집게다리를 왕의 손에 쥐어주고 초막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왕이 집게다리를 만지작하다가 박사에게 물었습니다.
“박사는 아시오? 게가 왜 옆걸음 치는지를?”
“앞으로 깊이 연구해 보겠습니다.”
“바보들, 난 알아!”
영이가 대소쿠리와 호미를 들고 나오며 말했습니다.
“해가 뜨잖아. 빛이 나잖아. 빛이 길을 만들도록 옆으로 비켜주는 거야.”
“빛이 나도록 비켜준다?”
“그게 대게가 하는 일이니까! 대게는 태양국 백성이니까! 땅을 귀하게 여겨서 걸을 때는 또 얼마나 조심한다고. 모래와 뻘을 안 밟으려고 발끝을 세우고 다녀.”
그리고 영이는 푸름 짙어가는 들로 달려갔습니다.
“덕이를 불러올까요, 더 기다릴까요?”
신하가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다. 그만 가자.”
그때 바다가 불타올랐습니다. 대게들이 마침 태양을 던져 올린 것이지요. 왕은 바다를 향해 오랫동안 허리를 숙였습니다.
‘덕이는 덕이의 일을, 대게는 대게의 일을, 왕은 왕의 일을!’
속다짐을 하고 돌아서니 태어나 처음 눈을 뜬 것처럼 왕의 눈이 밝았습니다. 다시없을 만큼 맑은 날이었습니다.
그 뒤, 왕은 영이가 준 집게다리를 비단주머니에 넣어 허리에 늘 차고 다녔습니다. 그런 어느 날, 부인이 흉한 물건으로 알고 버렸는데, 다시 찾지 못해 왕은 많이 안타까워했지요. 왕은 영이와 덕이에게 화공을 보내서 대게를 그려오게 했습니다. 반드시 구름 없는 맑은 날을 기다렸다가, 해가 수평선을 누르고 나올 때 세상을 물들이는 그 아침빛깔로 대게를 묘사하라 일렀습니다. 화공이 그려온 대게그림을 보고 왕은 흡족했습니다. 왕이 죽을 때 후손들에게 열 가지 가르침(訓要十條)을 남겼는데, 그 열 번째에,
“나라와 가정을 가진 이는 근심이 없을 때를 경계해야 하니, 옛일을 거울삼아 오늘 일을 경계하라. 대성인이신 주공도 성왕에게 ‘편안하지 않음’을 취하라 했으니, 마땅히 이 그림을 벽에 걸어 두고 출입할 때마다 보고 반성해야 한다. 마음에 늘 간직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고려의 왕위를 이은 후손들이 대대로 영덕대게 그림을 보배로 삼았다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지금은 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덕에 가면 항시 찜으로, 탕으로, 회로, 고려왕이 맛본 대게를 만날 수 있습니다.
조정일(극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공동기획 : pride GyeongD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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