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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전통을 이어온 봉화닭실마을 한과. 치자·검은깨·자하초·껍질 벗긴 깨 등으로 곱게 물들인 오색강정과 넓적하게 튀겨 만드는 산과, 약과, 한과 등이 어우러져 부드럽고 깊은 맛이 특징이다. <봉화군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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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이 마을은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조선 중종 때 명재상이던 충재 권벌(1478~1548)의 종가가 있는 곳이다. 특히 종갓집 며느리들이 맥을 이어오고 있는 한과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한과의 시작은 5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재 선생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당하고 유배길에 오르지만 끝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하지만 충재 선생이 돌아가신 후 복권되고 불천지위(不遷之位)에 오르게 된다. 그후 선생의 제사를 모시면서 갖은 정성을 들여 만든 제수용품 중의 대표적인 것이 닭실 종갓집 한과다. 500년 전통의 명맥을 이어오던 한과는 1990년대 초 명문가 며느리들의 한과솜씨를 썩히기 아깝다고 생각한 주위의 권유에 시중에 판매되기 시작했다. 특히 옛날 전통제조방식 그대로를 고집하기 때문에 부드럽고 달지 않아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옛 일왕도 그 맛에 감탄했다고 한다. ‘작가,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20편은 봉화 닭실한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1
동북을 병풍처럼 흐르는 문수산 줄기가 서남으로 뻗어내려 백설령, 동남으로 흘러서는 신선이 옥퉁소를 불었다는 옥적봉, 앞에는 문수산에서 발원한 창평천이 동에서 서로, 다른 한 줄기는 서에서 동으로 흘러 합강(合江)하면 내성천. 이 포근한 길지를 마을 서편 깎아지른 산상에서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닭이 알을 품었다는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상이 또렷하다. 봉화군 유곡리 마을이름이 ‘닭실’로 불리는 까닭이다.
“새 며늘아기는 어디 갔는데, 이래 아무 기척도 없노?”
입향조(入鄕祖) 안동권씨 충재 권벌 선생의 불천위(不遷位) 제사에 쓸 축문을 준비하고 있던 종손이 문득 붓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아까 보이 제사에 올릴 한과 만드는데 가는 거 같디더.”
종손의 막냇동생이 작은 형님들 눈치를 살피며 대꾸했다.
“뭐라카노! 종가에 새 며느리로 들어왔으면 뭐라도 하나 단디 배울 생각은 안 하고 어디를 나돈다 말이고, 더구나 밤마실을.”
“유과 만드는 것도 배워두면 좋은 일 아이니껴.”
“어허! 종부 될 사람이 배워야 할 기 얼만데 유과라이. 마을에 유과 빚는 집안 네들이 어디 한둘이가!”
“아이고, 새로 시집와 층층시하 눈치 보는 거 딱하다고 큰형수님이 일부러 보내는 거 같습디더. 모르는 척 하시소 고마.”
“뭐라? 허, 장손이라는 놈이 혼기를 놓쳐가 속을 태우디만, 늦게 본 며느리 오냐오냐 하다가 이제는 밤마실까지 내보내다니. 대체 제 정신인지, 쯧쯧.”
“이뻐하는 기야 뭐 어떻니껴? 고부간에 냉랭하고 엄하기만 한 거보다야 오순도순 사이좋은 게 훨씬 좋은 일 아이니껴. 그라고 요즘 세상에 밤마실이 무신 대수니껴? 멀리 대처는 말할 것도 없이, 봉화면에만 나가도 아낙들 밤길 돌아다니는 거야 이제 예사씨더.”
“이 사람이, 점점 갈수록……!”
종손인 큰형의 역정에도 막냇동생은 여전히 입가의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그 서열에 따라 형제간에도 위계질서가 엄한 가풍이었지만 막내에게만은 유독 너그러운 덕분이었다.
“더군다나 새 종부는 친정에서 가정교육은 물론이고 학교에서도 제대로 공부한 재원인데 무신 걱정이니껴. 뭐든 잘 해내고 금방 익힐 께시더.”
딴은 그랬다. 고운 자태도 그랬지만 달라진 세태의 사람같지 않게 눈썰미며 손놀림이 재바른 데다 밝은 성품만큼 매사에 적극적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집성촌의 종부라면 촌수로는 제일 아랫사람으로 마주치는 모두가 나이와 상관없이 손위가 되는 셈이니 마음고생이 만만찮을 것이라는 게 시아버지 되는 종손의 걱정이었다.
“그래도 집안일부터 배우지, 바깥으로 나가봐야 전부 층층시한데, 쩝.”
둘러앉은 종손의 동생들은 그제야 큰형님의 속내를 알아채고 저마다 슬며시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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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재 종가 며느리가 한과 세트를 정성스럽게 포장하고 있다. 대부분 주문식으로 한정 생산·판매한다. <봉화군 제공> |
#2
“새 종부. 여는 종손의 당고모 되시고, 저는 종할매 되시네. 또 저짝은 종조모가 되시고…….”
빼곡히 둘러앉은 아낙 중에는 그새 낯 익은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촌수는 도무지 외워지질 않았다. 게다가 또래이거나 대여섯 살 많아 보이는 이들인데도 모두가 아주머니이거나 고모, 심지어는 할머니, 증조할머니도 계시니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손위 어른인 셈이었다.
“그걸 한 번에 우에 다 알겄노. 불천위제가 코앞인데 우리는 퍼뜩 유과나 만드세.”
새 종부의 콧등에 진땀이 다 맺히려는데 중년의 아주머니가 나서 한 마디 하자 머리 하얀 할머니까지 군말 없이 제 자리로 돌아간다. 아무래도 촌수가 제일 위인 모양이다. 그 아주머니가 종부를 손짓으로 부르더니 제각각 일하는 곳으로 데려가며 설명해준다.
“유과는 먼저 고운 찹쌀을 일일이 손으로 골라내 가루로 빻아서 반죽하네. 그걸 평평하게 펴서 알맞은 크기로 자른 다음에는 저쪽 뜨거운 방에 펼쳐서 말리고. 저기 크기가 넓은 건 입과, 손가락만한 것은 잔과라고 하는데 그게 꾸덕꾸덕해지면 뜨거운 기름에 튀기거나 지져내지. 그런 다음에는 일단 기름기가 빠지도록 한 뒤, 조청을 묻히고 고물을 고슬고슬하게 묻혀 만드는데, 치자·자하초·검은깨·껍질 벗긴 깨 같은 걸로 전래의 검정과 흰색·분홍·황색·빨강색 등을 내네. 저쪽 찌짐방에서는 보통 70대 할매들이 튀기고 지지는데, 암만캐도 그게 제일 중요하이 경험 많은 이들이 맡아하제. 불천위제사는 물론이고 명절이나 시제, 각 기제사 때마다 제물로 필요하니 새 종부도 눈여겨보고 손에 익혀야 할기다. 결혼식 같은 큰 경사 때도 꼭 사용되고.”
“전 과정을 이처럼 일일이 손으로 하자면 시간과 공이 많이 들텐데 매번 이렇게 직접 만들어야 되나요?”
“뭐라카노? 그럼 손 마이 가고 귀찮다고 어디 장에서 사다 쓸 기가? 우리 닭실에서는 충재 할배 제사 때부터 벌써 500년이 되도록 그리 해왔다.”
마음이 상한 모양이다. 약간의 노기까지 밴 아주머니의 말투에 새 종부는 그만 주눅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니고…….”
“자네 충재 할배가 어떤 분이신 줄은 아나?”
“듣기는 했지만…….” “충재 할배는 조선 연산군 2년에 진사에 합격하시고, 중종 2년에 문과 차석으로 등과하시어 여러 당상관 자리를 지내셨는데, 을사사화 때 감히 바른 말씀을 하시다가 파직되어가 평안도 삭주로 유배를 가셔서 거서 돌아가셨다. 그렇지만 명종 임금님 때 신원되셨고, 선조 임금님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불천지위(不遷之位)에 올랐지. 그카이 보통 사람들 맹쿠로 고조부모까지 4대 봉사(封祀)로 끝나는 게 아이라 영구히 봉사하라꼬 나라에서 명하신 분이시다. 그게 을매나 영광된 일인가 카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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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부터 이미 여러 차례 들은 이야기다. 벼슬이 높아서가 아니라 선비의 곧은 절개로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학문으로 일가를 이뤄 영원히 귀감이 될 분들에게만 불천위의 영예가 내려진다는 것을. 또한 충재 선생 이후 이곳 닭실 후손 중에서는 수많은 충신, 효자, 문장가, 서화가가 나왔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왜적에 맞선 의병과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가도 적지 않아 찾아보기 드문 영예로운 가문이었다.
20세기 여인으로 층층시하에, 고리타분하게 치부되기 십상인 가문의 전통을 지켜내고 제사를 모시는 것이 가장 큰 소임이 되는 종부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새 종부로 들어온 이는 어쩐지 어렵고 고단한 그 길에 큰 자긍심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만으로 기꺼이 그 길을 걸으리라 결심했다. 물론 그러기에는 무엇보다 평생토록 자신을 지켜주고 보듬어줄 이에 대한 믿음이 가장 큰 힘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막상 집안에 들어와서 보니 자신만이 아니라 마을 대부분 여인이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고, 소박한 듯 보이나 깊은 평온과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더구나 시어머니와 아직 크게 건강을 잃지 않은 시할머니에게서 느껴지는 기품과 자긍심은 자신의 선택이 결코 그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그런데 유과는 언제부터 있었던 거예요?”
새 종부는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문중 이야기를 돌릴 요량이었다.
“그기 삼국유사에 벌써 기록이 있었다카이 천년도 훨씬 넘은 기재. 아마도 단 기라고는 꿀이 전부인 줄 알았다가 엿기름을 고아 당을 만들고, 조청을 만들면서부터 여러 음식을 생각 안했겄나. 글치만 암만 그런 기 있다 캐도 단 거는 역시 귀한 음식이라서 주로 손님을 맞거나 제사를 모실 때 썼재.”
“요즘은 달고 맛있는 과자가 참 흔한데, 여전히 이렇게 직접 유과를 만드는 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예요?”
“아이제, 유과를 어데 마구 만들어내는 과자에 비할끼고. 이건 그냥 과자가 아니라 가가례(家家禮)라고, 집집마다 전승되는 방법에 따라 만드는 거니 손님과 조상을 모시는 그 집안의 정성과 기품이 담겨있는 예물(禮物)인기라. 또 맛도 그저 달기만 한 시중 과자와는 비교할 바가 아닌 은근하고 깊은 맛이지. 건강에도 나쁘지 않고.”
“그럼 우리 유과를 외부 사람들에게 판매도 하는 건 어떨까요?” “뭐라카노, 이 사람이. 이 건 방부제 같은 걸 안 쓰기 때메 생물이나 마찬가지다. 그저 한 보름 사이에 먹어야 하는 긴데 우에 내다 판단 말이고?”
“미리 주문을 받아서 만드는 거지요. 특히 명절 때는 이런 특별한 선물을 찾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홍보만 잘하면 주문받는 건 문제 없을 것 같은데요.”
새 종부는 눈빛을 반짝거렸지만 아주머니들은 시큰둥했다.
“씰데 없는 생각 치우게 그마. 암만 도회에서 살았다 캐도 우째 그래 셈만 챙기노.”
타박에 새 종부는 생각과 달리 잇속으로만 보였나 싶어 고개를 숙이는데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끼어들었다.
“그건 새 종부 말에 일리가 있는 거 같니더. 꼭 돈 때문이 아니라 우리 닭실이 이래 산중에 깊이 있어 우리 문중의 정신을 아는 사람이 적은데, 새종부 말 맹쿠로 유과가 널리 알려질 수 있다면 우리 문중이 지켜온 정신도 같이 알게 될 거 아이껴. 요즘같이 난잡한 세상에 일 년에 몇 사람이라도 정성 담긴 우리 닭실 유과로 맑은 정신을 생각해볼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니껴.”
촌수 탓에 손아래가 되기는 해도 이미 환갑을 지낸, 마을 아낙 중에서도 지혜가 깊다고 여겨지는 이였다. 가장 윗사람이 되는 중년의 아주머니도 새삼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할라카면 마을 아낙들 전부가 손을 내야 될 낀데…….”
그렇게 시작된 닭실 한과판매는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변함없는 정성의 맛으로 국내 명문가와 선비정신을 잇는 이들에게, 집안의 손님 접대와 선물용으로 애용되고 있다.
김정현(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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